등록날짜 [ 2021-08-17 10:15:49 ]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군중의 순간적인 돌변은 기괴할 만큼 의아하다. 수많은 병자를 고치고, 선한 이적을 베풀고, 가난하거나 사회에서 천대받는 자들을 가까이하셔서 예수님의 이적을 직간접적으로 겪지 않은 이가 없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자 어디를 가나 인산인해여서 유대교 성직자들은 자신들의 권력을 위협하는 예수를 점점 더 경계했다. 베데스다 연못에서 38년 된 병자를 낫게 하고 소경으로 태어난 자를 고치셨을 때 바리새인 등은 이날이 안식일이었다며 예수를 적대할 명분을 쌓아 간다. 유대성회는 오랜 세월 질병을 앓아 가며 고통받은 사람들의 병 나은 기쁨을 헤아리는 최소한의 양심 따위는 없었고, 더는 민심을 빼앗기면 끝장이라는 정권욕만 남아 있었다.
충격적인 것은 저들의 공작에 순식간에 넘어간 군중이다. 오병이어 이적을 계기로 예수님의 인기는 극에 달했다. 군중은 “다윗의 자손, 호산나”를 외치면서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반겼다. 저들은 예수님이 그 같은 이적을 계속 베풀어 굶주림을 끝내고, 로마와 앞잡이 왕 헤롯의 압제에서 해방해 줄 경제적·정치적 메시아를 그렸다. 그러나 군중의 뜻대로 되지 않자 유대회의 공작과 잘 맞아떨어지며 주님께 분노를 표출하고 배신하며 돌변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 여태 은혜받은 수많은 이는 어디로 갔던가.
예수를 만난 우리도 당시 이스라엘 백성처럼 돌변해 예수를 십자가에 매달고 픈 충동을 느낄지 모를 시험을 경계해야 한다. 말기 암에서 성령의 이적으로 치유받아도 육체를 가졌기에 언젠가는 소천한다. 주님 은혜로 많은 물질을 쥐게 되어도 떠날 때는 빈손이고 그전에 궁핍에 처할 수도 있다. 사랑하는 사람을 먼저 떠나보낼 수 있고, 간절히 바라던 바가 좌절될 수도 있다. 팬데믹 같은 천재지변이 생각지 않은 시련을 가져올 수 있고, 대부분의 사람이 그렇듯 말년에 병상에서 쓸쓸한 시간을 보낼 때가 오기도 한다. 2000년 전 이스라엘의 군중처럼 내 생각, 내 뜻과 현실이 같지 않을 때 세상권세의 이간질들로부터 흔들리지 않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리라.
“무리를 보시고 민망히 여기시니 이는 저희가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유리함이라”(마9:36). 이 외에도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마14:14, 15:32, 막6:34)라는 말씀이나 병자를 불쌍히 여기신 말씀은 성경에 자주 등장한다. “민망히 여기다”(σπλαγχνίζομαι, 스플랑크니조마이)는 ‘장이 끊어지게 아플 만큼 불쌍히 여기다’는 뜻이며, 무리와 병자를 보고 불쌍히 여기신다는 영어성경의 어휘는 ‘Compassion’이다. Com(함께)+Passion(느끼다)란 합성어, 즉 나의 고통을 공유하신다는 의미다.
지금 겪는 이 고난이 아무리 어려워도 지금 이 슬픔과 힘듦을 내 주님이 보시고 함께 울어 주신다는 것이 사실이기에 2000년 전 군중처럼 세속의 바람이 틀어졌다고 해서 십자가에 다시 매다는 배신에 빠지지 않는다. 힘들고 슬플 때 혹은 오랜 병치레로 어쩔 수 없이 가까운 가족조차 그 고통을 모를지라도 나를 안아 주고 나보다 더 울어 주시는 주님을 경험하고 있다는 것이 이적보다 중요한 이유다. 짧은 인생이라도 오늘 밤 골방에서, 병상에서 눈물 흘릴 때 곁에 누가 계신지 보라.
위 글은 교회신문 <712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