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날짜 [ 2021-09-01 11:36:23 ]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 승천하지 않고 부활한 몸으로 지금까지 전도하면서 세상에 거하신다면 어떤 일이 생길지 가정해 보자. 그 당시 사람들이 눈에 보이는 이적을 구한 것처럼 사람은 눈에 보이는 것에 집착하게 마련이다. 하지만 눈에 보이는 엄청난 이적 앞에서도 당시 사람들은 자신들의 욕망을 채우지 못했기에, 예수에 대한 숭배는 증오로 바뀌었다.
오늘날이라고 다를까. 모든 미디어에서 예수님의 말씀 한 마디, 의상, 조그마한 몸짓까지도 엄청난 파급효과를 부르는 영향력을 발휘할 것이다. 예수님이 설교하는 방송의 중계판권은 천문학적 금액일 것이고 예수님을 한 번이라도 대면하는 것이 소원인 사람들의 사연이 셀 수 없이 쌓일 것이다. 가진 자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예수님 측근에 줄을 댈 것이고, 예수님 주변은 최고의 권력기관이 될 것이다. 가룟 유다처럼 측근 비리도 끊이지 않을 것이고, 전쟁이나 큰 재난이 있을 때마다 마치 부활하고 승천하시기 직전까지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때니이까”(행1:6)라고 물은 것처럼 압제자들을 타도해 주지 않느냐는 원망부터 개개인의 민원도 파다할 것이다. 마귀는 이런 불만들을 부추겨 선동할 것이고 지지자와 반대파의 충돌로 조용할 날이 없을 것이다.
예수님은 인간의 이런 한계를 아셔서 승천하신 후 우리 각자에게 보혜사 성령 하나님을 보내 주셨다. 예수님의 곁에 있어도 빌립처럼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요14:8)라고 말하는 게 우리의 어리석음이다. 주님은 답하신다. “내가 스스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어서 아버지의 말을 하는 것이며 나를 본 것이면 아버지를 본 것”(요14:9~10)이라고, 또 내가 아버지께로 가면 성령을 보내 줄 터인데 성령께서 (나와 아버지처럼)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요14:17)고 약속하셨다.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요14:14)라는 민원 창구까지 열어 주셨다.
부부간에도 배우자의 깊은 사정을 다 아는 것은 아니다.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 사람의 사정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는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정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고전2:10~11). ‘통달’의 원문 ‘ἐραυνάω(에라우나오, search and examine)’는 “(철저하게) 찾아내고 검증하다”는 의미다. 눈에 보이는 예수님이 지금 계신다면, 과연 우리는 우리 사정을 가장 잘 아는 우리 영을 지으셨고 하나님의 사정에 ‘통달’하신 성령님과의 교제에 24시간 집중하려는 믿음을 키우기 어려울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을 쉬게 할 온유하고 겸손하신(마11:29) ‘참 리더’이시다.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시나 성령으로만 행하시는 본을 보이신 주님은, 세상 무거운 짐을 예수 앞에 내려놓고 서로 사랑하고 감사하고 성령을 근심시키지 않는 주님의 가벼운 멍에에만 붙들려 있으면 평안이 있다고 쉽게 사는 법을 알려 주셨다. 반면 세상의 ‘영웅’이나 종교 ‘교주’들의 리더십은 자기가 주인공이고 자기 팬덤을 만들기에 분별할 수 있다.
위 글은 교회신문 <714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