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날짜 [ 2021-10-05 09:51:30 ]
하나님께서 다니엘에게 맡기신 예언은 역사의 끝에 주님이 오시는 ‘말세’에 초점을 맞춘다. 그리고 그 ‘말세’의 예언을 끝으로 주님은 당분간 봉함을 명하셨다. “다니엘아 마지막 때까지 이 말을 간수하고 이 글을 봉함하라 많은 사람이 빨리 왕래하며 지식이 더하리라”(단12:4). 자신의 수명까지 계시로 알던 다니엘도 이해하지 못해 다시 묻지만 주님은 재차 말씀하신다. “다니엘아 갈찌어다 대저 이 말은 마지막 때까지 간수하고 봉함할 것임이니라”(단12:9).
아마 고대문명인 당시에 “많은 사람이 빨리 왕래”하는 첨단 정보화 시대를 가늠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마지막 때와 징조를 묻는 제자들에게도 예수님은 “매일 드리는 제사를 폐하며 멸망케 할 미운 물건을 세울 때부터 일천 이백 구십일을 지낼 것이요”(단12:11)를 인용해 “그러므로 너희가 선지자 다니엘의 말한바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읽는 자는 깨달을 진저)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찌어다”(마24:15~16)라고 하셨다.
“주님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후 지난 2000년 동안 처처에 기근, 지진, 환란, 미움, 민족의 분쟁, 전쟁, 역병은 반복되었는데 맨날 하는 소리 아닌가?”라고 반문할지 모르겠지만 “이런 일이 있겠으나 끝은 아직 아니니라”(마24:6) 하셨고, “매일 드리는 제사”가 “멸망의 가증한 것”으로 대체됨을 주목해야 한다. 이 제사는 어린양과 밀가루 반죽의 ‘번제’였으나 포로로 잡혀간 다니엘이 그럴 수 없어 하나님께 날마다 세 번 기도하듯, 그리스도의 보혈로 제사가 필요 없어지고(히7:27) 예배로 바뀐 지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12:1)가 지금의 의미다.
원래 ‘제사’ 자체가 속죄의 개념이요, ‘피’를 봐야만 죄를 사할 수 있기에 ‘제물’이 필요하다. 그런데 ‘산 제사’의 원문 ‘θυσίαν ζῶσαν’(뒤시안 조산, sacrifice living)은 정확히는 ‘산 제물’로 너희 몸을 죽이지 않고도 제사드릴 수 있음은 주님이 대신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셨기 때문이니 날마다 너희가 죽거나 다른 제물을 바칠 필요 없이, 날마다 죄짓는 너희는 죄를 내놓고 회개하며 그리스도에게 감사하는 영적 예배를 그치지 말라는 말씀이다.
이제는 물리적으로 예배를 막을 뿐만 아니라, 죄를 죄가 아닌 당연한 가치로 양심의 근본에 화인을 찍는 시대가 왔다. 젠더(gender) 이슈와 가족의 근간을 무너뜨리는 이념들도 법과 정당성의 반열에 둔 채 죄를 지적하는 이를 처벌하는 시대는 이전 어느 시대에도 없었고, 육신의 본능의 충실을 꼬집으면 마치 ‘꼰대 짓’인 것처럼 비웃음을 사는 풍조이며 교회 안에도 회개의 예배는 사라져간다. 지금은 “예수의 보혈 앞에 날마다 드리는 회개와 감사의 예배”가 “회개 자체가 필요 없는 양심의 파괴”로 대체됨이 가속화하는 시대다.
주님이 언제 오실까 조롱하는 이들에게 베드로가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은 이 한가지를 잊지 말라 주의 약속은 어떤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벧후3:8~9)고 말씀하셨듯 주님은 회개하는 이를 기다리며 잠시 참으셨지만 이제 성령의 지혜를 가진 이들은 봉인이 풀리는 것을 보고 있을 것이다.
위 글은 교회신문 <718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