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날짜 [ 2022-03-28 15:06:37 ]
예레미야는 수줍음 많고 말도 어눌했으나 하나님으로부터 비밀한 부르심을 받았다. 유대 민족의 운명을 맡은 선지자로서 특별한 소명이었으나 예레미야는 자신이 없었다. “내가 이르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보소서 나는 아이라 말할 줄을 알지 못하나이다”(렘1:6)라고 반응했다. 원래 예레미야의 히브리어 ‘יִרְמְיָהוּ(이르미아우)’는 ‘비탄’이라는 뜻이다. 그렇게 예레미야는 죄악 가운데 빠진 우리 슬픈 인생들에게 ‘돌직구’를 날려야만 한 메신저로서 주님께서 복중에 있을 때부터 구별하신 종이었다(렘1:5).
오늘날 교회 안의 모든 성도는 각자가 주님께서 부르신 부르심의 소망(소명)이 있기에 “너희 눈을 밝혀 이를 알게 하기를 기도하라”라고 명령하신다(엡1:18). 그러나 모두가 기도와 말씀에 전무하고, 네 양을 치는, 목사와 감독과 같은 직분을 맡은 것은 아니기에 현대 교회에서도 성직자로서의 소명은 예레미야처럼 분명 특별하다.
눈물의 선지자 예레미야도 이사야, 미가, 하박국처럼 바벨론에 의한 유다의 멸망을 미리 보았다. 창녀도 울고 갈 만큼 가증하게 음행하는 이스라엘의 실상을 낱낱이 지적한다. “이스라엘아 내게로 돌아오라. 나는 네가 그러다가도 그치고 돌아올까 했다. 네가 만일 나의 목전에서 가증한 것을 버리고 마음이 요동치 아니하며 진실과 공평과 정의로 서약하면 나도 복을 베풀 것이나, 회개치 아니하면 그 파멸을 아무도 막을 수 없고 온 땅이 곡소리로 뒤덮일 것이다”(렘4장 中)라는 경고를 시작으로 이스라엘의 만연한 간음과 음행, 돈을 위해 바알과 아세라에게 점치고 분향하듯 두 주인을 섬기고, 과부와 고아와 약한 자들에 대한 불평등을 완전히 뿌리 뽑지 않았을 때의 처절한 결과를 반복해 경고했다.
누군들 모든 이에게 멸시와 조롱을 받아 가며 사역하고 싶을까. 어쩌면 예레미야, 즉 ‘이르미아우’라는 이름은 성령께서 그를 통해 쓰신 또 하나의 책 제목, 애가(哀歌, 슬픈 노래)만큼이나 참 소명을 받은 사역자의 주제어이다. 그 소명자가 이르기를 “나와 너 이전 선지자들이 자고로 여러 나라와 큰 국가들에 대하여 전쟁과 재앙과 염병을 예언하였느니라 평화를 예언하는 선지자는 그 예언자의 말이 응한 후에야 그는 진실로 여호와의 보내신 선지자로 알게 되리라”(렘28:8~9)라고 선포한다.
그러나 그때에도 대중과 권력자들의 비위를 맞추고 인기에 영합하는 성직자들이 훨씬 많았다. 선지자 하나냐는 예레미야의 목에 있던 멍에를 빼앗아 대중 앞에서 꺾어 버리면서 “주께서 2년 안에 바벨론 왕의 멍에를 모든 민족의 목에서 벗겨서 이같이 꺾어 버리겠다”라고 퍼포먼스를 펼친다. 이 얼마나 대중을 열광케 만들 만한 사이다 같은 장면인가. 대중 앞에서 모욕당한 예레미야는 아무 말 없이 자리를 떴으나 하나님께서는 하나냐의 목숨을 거두셨고 사이다에 열광하느라 회개할 기회를 놓친 이스라엘은 이후 오랜 세월 동안 포로 생활을 한다. 온역과 전쟁의 시대, 재정적 거품과 빚잔치의 시대, 음란함을 당연시하고 돈을 떠받들고 조회 수, 구독, 좋아요 등에 눈치 보는 시대에 떠올려야 하는 단어가 이것이다. 사람 바라보지 않고 회개와 기도의 노동을 끝없이 외치는 애통의 탄식! ‘예레미야!’
위 글은 교회신문 <742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