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날짜 [ 2022-07-20 08:13:24 ]
“무론 무슨 일에든지 시기와 판단이 있으므로 사람에게 임하는 화가 심함이니라 사람이 장래 일을 알지 못하나니 장래 일을 가르칠 자가 누구이랴”(전8:6~7). 사람들은 화를 피하고 부를 얻을 목적으로 미래를 예측하고자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 수많은 전문가가 ‘이럴 것’이라고 예측하지만 화를 피하게 해 줄 이는 없다. 주식시장이 무섭게 치솟다가 반 토막이 나고 전 재산을 날린 이들이 속출해도 사람들은 또 어떻게 하면 화를 면하고 기회를 잡을까 싶어 미디어를 켠다. 판단할 수 있는 지위에 앉아 있으면 뒤통수에 눈이 달리는데 그 시력은 5.0이다. “그렇게 올랐으면 빠질 줄 몰랐니?”, “국제 정세가 이런데 전쟁이 발발할지 왜 예측하지 못한 거야!” 이런 사람들은 집에서도 가족들에게 “미리 예약을 했어야지 뭐 하고 있었어”라는 식으로 매사에 뒤통수 시력을 발휘한다. 사실 당하는 사람들은 속으로 이런 생각들을 할 것이다. ‘그걸 제가 알면 여기에서 당신에게 욕먹고 있겠습니까?’
참 연단을 받은 사람은 결코 결과론으로 말하지 않는다. 많은 기독교인이 고생한 것을 가지고 ‘연단받았다’고 여기는데 모든 고생이 연단은 아니다. 어차피 우리 삶은 고생이 가득하다. “보라 내가 너를 연단하였으나 은처럼 하지 아니하고 너를 고난의 풀무에서 택하였노라”(사48:10), “도가니는 은을, 풀무는 금을 연단하거니와 여호와는 마음을 연단하시느니라”(잠17:3) 등 구약에 수없이 등장하는 ‘연단(צָרַף, 싸오라프)’은 말 그대로 대장간의 담금질이다. 쇠를 뜨거운 불에 달궈 망치로 내리쳐 불순물을 떨어뜨림과 동시에 밀도를 높여 단단하게 한 후 차가운 물에 갑자기 집어 넣어 순식간에 온도를 낮추기를 반복하면 고순도의 단단한 쇠로 거듭난다.
그래서 헬라어는 더 명확히 설명한다.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롬5:3~4).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벧전1:7). 분명 ‘연단’에는 환난과 시련이 있다. 그리고 여기에서 견뎌 낸 ‘연단(δοκίμιον, 도키미온)’은 “제련하여 진품으로 증명된 것”이란 뜻이다. 헬라어-영어 사전에는 진품(genuineness), 성품(character)으로 되어 있다. 얼핏 담금질 과정의 기원을 이해하지 못하면 왜 ‘연단’의 헬라어-영어사전이 ‘진품’이나 ‘성품’으로 되어 있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그러나 곧 연단이란 고난을 끝까지 견뎌서 “겸손하게 자신의 연약함을 깨닫고 오직 주님만 바라보는 믿음과 구원의 소망만을 가지는 것에 성공”한다면 비로소 ‘진품’이 되고 이것이 이 사람의 ‘성품’으로 바뀐다는 것을 헬라어 성경 기자들은 알았다.
연단은 한두 번 겪는 고난으로 되는 일이 아니다. 담금질처럼 살면서 냉탕과 온탕을 얼마나 겪는가. 연단 후 진품이 되면 결과론으로 상처 주지도, 다 알고 있었던 것처럼 말하지도 않는다. 미래는 하루아침에 어떻게라도 뒤집힐 줄도 알기에 장래 일을 아시는 성령님만 의지해 늘 기도한다. 섰다 했을 때 넘어져 보았으므로 잘나갈 때도 자랑하지 않으며 오직 약한 것만 자랑하여 질그릇에 담긴 그리스도만 드러낸다.
위 글은 교회신문 <758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