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날짜 [ 2022-08-06 09:13:09 ]
“예수” 이름을 들으면 어떤 말씀이 가장 먼저 떠오르는가? 또 “하나님 아버지”라고 할 때 나는 정말 ‘아버지’를 이해하고 있는가? 오직 성령으로만 하나님의 깊은 것을 이해할 수 있지만(고전2:10), 그럼에도 세상 임금인 마귀는 우리가 하나님을 온전히 알지 못하도록 방해한다. 가령 알코올 중독이나 가정폭력을 일삼는 부모 밑에서 성장한 사람은 예수님을 구주로 만난 다음,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면서도 마귀의 교묘한 폭력, 학대의 유산으로 예수님의 사랑이 대가가 없다는 것을 믿지 못한다. ‘돼지를 잡아먹으려고 키우는 것과 같은 원리’라는 세계관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수도 있다.
항상 부모, 선생님, 배우자, 주변사람들로부터 “아직 멀었어”라는 압박 속에 살았을 대부분의 우리나라 사람들은 어떨까? 항상 옆집, 엄친아 등과 비교당하고, 교회 안에서도 사도 바울, 슈퍼 크리스천 등에 비해 기능과 업적은커녕 먼지 보다 작고 세상에서도 패배자요, 교회에서도 밥값 못한다는 나 같은 자를 왜 놔두시는지 스스로도 납득할 수 없기에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데로 내어 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마25:30) 하시는 주님을 달란트 정산자로 연상한다. 혹 예수님에 대해 “자녀의 떡을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않다”(마15:26) 같은 이미지가 떠올랐다면 여전히 존재감 없고 거절받는 반복된 아픔에서 헤어나지 못함을 원수가 악용하는 진(陳) 가운데 갇혀 있음을 방증한다.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시라 그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인하여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습3:17). 주님과 인격적 관계가 없고 공포의 지배자, 심판자가 가장 먼저 떠오를 만큼 예수님과 싸늘한 사이라면 이 말씀도 “언제 한 번 밥 먹자”처럼 지나가는 소리쯤으로 들린다.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계2:4~5). 성령님은 에베소교회가 수고하고, 인내하고, 악한 자나 거짓 사도들도 분별하고, 게으르지도 않았다고 하셨다. 문제가 없었다. 그런데도 직분 박탈의 엄중한 경고까지 하심은 ‘처음 사랑’을 버렸기 때문이라 하신다.
여기에서 ‘처음 사랑’을 “주님을 처음 만나 뜨거웠을 때의 열정과 열심”으로 많은 이가 생각하지만 한글로 직역된 의미만은 아닐 것이다. ‘처음’인 ‘ πρῶτος(프로토스)’는 첫 번째(first)라는 숫자적 의미뿐 아니라 ‘가장 중요해서 제일 앞에 오는’, ‘가장 중요한 원칙’(principle)이란 의미를 더 강하게 내포한다. 단지 숫자적 ‘처음’이 아님은 5절의 ‘처음 행위’도 동일하게 ‘프로토스’이기에 분명해진다.
결론적으로 성령께서는 “수고하고 업적을 낼지는 몰라도 너희는 ‘가장 중요한 원칙(Rule No.1)’을 버렸어!”라고 책망하신 것이다. 풀어 쓰면 이렇다. “너희가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두려움과 조직의 힘과 나를 오해하는 것과 개인의 허영과 다른 동기들로 수고하고 있잖아! 너희가 어디서부터 떨어졌는지 생각해 보라!”
위 글은 교회신문 <760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