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용어 알파와 오메가·116]‘교만’한 자를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나니

등록날짜 [ 2022-08-18 14:33:38 ]

성경에서 우리말로 ‘교만’이라고 번역되는 히브리어의 ‘ןואג(가온)’과 헬라어의 ‘ὑπερηφανία (후페라이파니아)’는 둘 다 기원된 의미가 같고, 세 가지 의미를 동시에 내포한다. 가장 먼저는 자부심(pride)이며 둘째는 탁월함(genius)이나 압도하는 위엄(majesty), 셋째는 거만함(arrogance)이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문화적·언어적 차이 때문에 ‘교만’의 핵심 의미인 자부심이나 탁월함보다 하나님 없이 살 수 있다는 거만함 정도로 한정할 때가 많다.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자녀들이 교만의 올무에 걸린 채 인생을 마치지 않도록 교만을 미워하신다. 대표적 인물인 모세는 애굽 왕자로서 당시 최고 문명에서 왕족 교육을 받았고 지식, 신분, 용모 등 모든 것이 최고였던 청년이었으나 하루아침에 살인자가 되어 미디안 사막으로 도망쳤다. 이어 최소 5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양만 치다가 80세가 되었다면 어떻게 될까. 주님이 온갖 이적을 보이고 친절하게 스스로를 소개하셔도 “주여 (저 말고) 보낼만한 자를 보내소서”(출4:13)라며 자존감이 전무한 상태에서 온유함을 배웠다. 


그런 모세에게 누구보다 가깝던 누이, 미리암이 죽었다(민20:1). 어쩌면 누이가 죽은 게 자신 탓인 것 같아 모세는 더욱 견딜 수 없었으나(민12:10), 군중은 모세의 슬픔은 안중에도 없고 당장 마실 물이 없다고 원망 타령을 시작한다. 요즘 말로 ‘멘탈’이 무너졌다.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더라”(민12:3) 말씀처럼 모세가 무너졌다면 누구나 무너질 상황이었다. 그렇게 마음이 무너진 모세는 반석을 지팡이로 치는데 전과 달리 ‘두 번’ 친다(민20:11). 드라마처럼 설명하면 “내가 어느 때까지 패역한 너희의 응석과 욕을 받아가며 물을 내줘야 하는데!”라면서 ‘두 번’이나 두드려 패는 폭발이다. 이렇게 회중과 다툰 모세는 요단강 너머 가나안에 못 들어간다고 주님은 말씀하셨다(민20:12).


인간적으로 보면 하나님께서 모세의 마지막 소원 하나 못 들어주시나 싶다. 실제로 모세도 가나안으로 건너가게 해 달라고 구하지만, 주님은 “그만해도 족하니 이 일로 다시 내게 말하지 말라”(신3:26)라고 딱 자르신다. 여기에 하나님의 깊은 사랑이 있다. 요단을 건너고 안 건너고가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모세가 고작 “드디어 결승선을 통과했어!”라든가 가나안에서 어떤 영웅적인 죽음을 꿈꿨더라면 그것은 광야에서 연단받은 온유한 모세다움을 버림이요, 자부심 곧 교만에 잠식당해 말년을 그르치는 것이 될 것이다. 한없이 깊으신 주님은 모세다운 온유하고 겸손한 마무리를 선사하셨고, 요단 저편에서 도피성을 만들게 하셨는데(신4:41~42), 도피성이야말로 죄인인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참 표상이니 모세가 받은 사랑이 얼마나 큰 것인가.


명문 학교, 학위, 세상이 흠모하는 라이선스 직업, 훌륭한 경력, 화려한 사역의 업적 등. 하다못해 군 시절 무용담, 외모, 재능, 소유 같은 배설물들이 본의 아니게 또는 의도적으로 평생 꼬리표처럼 따라다니며 자부심을 내려놓지 못하게 하는 덫이다. 그렇게 누가 자꾸 언급해 주었음 싶고, 언급하는 그 자부를 성경은 ‘교만’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모세는 벌을 받은 것이 아니라 사랑을 받은 것이다.



위 글은 교회신문 <762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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