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용어 알파와 오메가·119] 인류의 ‘슬픔’을 짊어진 예수

등록날짜 [ 2022-10-05 10:32:40 ]

요한복음은 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그리스도를 십자가의 죽음으로 몰고 가는 결정적인 사건들을 중심으로 써 내려가 전개가 빠르다. 2장부터 예수께서는 성전에서 장사하는 이들의 판을 뒤집어엎으시면서 배후에서 엄청난 이권을 챙기던 제사장, 바리새인들과 정면충돌한다. 5장에서는 38년 된 병자를 고치시는데 이날이 안식일이다. 여기서 유대교 지도자들의 위선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38년 된 병자는 여전히 낫기를 희망하며 베데스다에 들어가기를 기다리나, 이런 병자의 고통, 슬픔, 간절함 따위는 안중에도 없고 율법에도 명확하지 않은 안식일에 병자를 고친 게 무조건 죄라고 우기는 공회원들은 아귀의 모습 같다. 


이어 6장에서 오병이어 이적으로 사람들에게 치솟는 인기는 산헤드린 공회의 역린을 제대로 건드리고, 7장에서 예수가 갈릴리 사람이라고 낙인찍는데 누가의 기록처럼 조금만 알아보아도 호적이 베들레헴인 것을 알 수 있었을 터이나 무조건 낙인찍는다. 또 8장에서 너희가 자유하지 못함을 말씀하시자 “아브라함의 자손인 우리는 누구의 종 된 적이 없다”(요8:33)라고 말하는 장면은 어이없음의 극치다. 애굽, 바벨론, 바사의 노예 생활을 거쳐 현재 로마의 치하를 받고 있는데도 그들은 객관성조차 잃었다. 9장에 날 때부터 소경된 자를 고치자 더욱 급해져, 그간 소경의 슬픔 따위는 알 바 아니며 그는 날 때부터 저주받은 존재이자 안식일을 어긴 공범자로 몰 뿐이다. 


죽은 나사로를 살린 11장에서 그 정점을 찍는다. 더는 반박할 수 없는 이적이었다. 그때 대제사장 가야바가 말한다. “너희가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도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지 아니하는도다”(요11:49~50). 나사로 사건으로 산헤드린 내부에서조차 동요가 일자 가야바가 화를 내며 하는 소리다. 이대로라면 예수 때문에서 또 봉기가 일어나고 그러면 많은 자가 로마에 학살당할 것이라고. 차라리 여기서 한 사람, 예수를 죽여 민족을 구하자는 말이다. 요한은 이를 영적으로 맞는 말이라고 했으나, 가야바 개인으로는 성경을 상고하는 일말의 신앙도 버리고 오로지 이권에 눈멀고 이에 야합한 수혜자들과 무지한 동조자 그리고 백성들은 욕심을 따라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는다.


미가서 3장 11절 처럼 오늘날도 이와 같으니 사람에게서 위로받으려는 자, 삯을 위해 교훈하는 콘텐츠만 쫓는 자는 반드시 넘어진다.


오직 부활하신 주님만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다”(사53:4)고 하셨다. 질고를 뜻하는 ‘ילח(크홀리)’는 질병, 고통, 아픔이라는 뜻이다. 슬픔을 뜻하는 ‘בֹ אָכַמ(마코브)’는 감정의 단어가 아니라 고통을 수반하는 괴로움(painful grief)이라는 뜻이다. 주님은 나를 보고 민망히, 곧 장이 끊어지는 슬픔을 여기며 낫게 하셨고, 안식일도 개의치 않고 고치셨으니 루터의 신앙 개혁 때처럼 각자가 성령의 감화로 말씀을 상고하여 그리스도를 만나 위로받고 내가 그와 동일한 십자가의 전달자가 되는 것만이 시험에 빠지지 않는 길이다. 제사장이 아니라 부활하셔서 살아 계신 주님이 오늘도 당신을 만나 주심을 잊지 말라.



위 글은 교회신문 <768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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