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날짜 [ 2021-06-26 08:54:58 ]
노아처럼 장수 가능했던 이유는
궁창 위 물이 유해광선 차단해서
현대과학 풀지 못한 수수께끼들
창세기 1장 기록으로 설명 가능
하나님은 창조 첫째 날에 시간과 공간과 지구(물질)를 만드셨는데, 그 지구는 지금처럼 짜임새 있는 모습이 아니었고, 생물 하나 없이 텅 비어 있었다.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수면 위를 하나님의 영이 움직이고 계셨다(창1:1~2). 둘째 날에는 하나님이 지구 위를 두르고 있는 둥근 공간(궁창, 대기권)을 만드시고, 궁창 위와 아래의 물로 나누셨다.
궁창 위 물층의 역할
궁창(지구 대기권) 아래의 물은 지구에 존재하는 강, 바다, 지하수 같은 물임을 쉽게 알 수 있지만, 궁창 위의 물층은 무엇인지 현대 지구과학으로는 이해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현재 지구 대기권 위에는 물층이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대기권 위에 물층이 있었다면, 그 물층의 역할은 무엇이었으며, 언제 무슨 이유로 없어졌을까?
궁창 위의 물은 말 그대로 물층이었다는 해석과 오늘날의 구름과 유사하지만 구름보다 밀도가 큰 빽빽한 수증기층(욥26:8)이었을 것이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궁창 위 물층의 존재를 오늘날의 과학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창조 당시의 지구 대기권은 오늘날의 지구 대기권과는 전혀 다른 구조였다는 것이다.
궁창 위의 물층은 둥근 지구를 마치 비닐로 둘러싼 것과 같은 형태였을 것이고, 궁창 위의 물층은 두 가지 역할을 했을 것이라고 과학적 추론을 할 수 있다. 첫째 역할은 생명에 해로운 자외선, 엑스선, 감마선 같은 강한 우주선을 1차적으로 차단해 주는 역할이다. 설령 물층을 통과한 강한 우주선이 있더라도, 대기권 내에 있는 오존층에 의해 이중 차단됨으로써 지구상에는 들어올 수 없었다.
둘째 역할은 지구 표면을 비닐처럼 둘러쌈으로써 온실효과가 발생하여 지구 전체가 골고루 따뜻하게 되는 기능을 담당한다. 궁창 위 물층을 통해 생명체가 살기에 가장 적당한 고온다습한 아열대성 생태 조건이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이러한 궁창 위 물층의 역할 때문에 노아 홍수 이전까지 지구에서는 식물이 잘 자라고, 산림은 울창했으며, 먹을 것이 풍부해서 공룡 같은 큰 동물들이 번성할 수 있었다. 오늘날 동토의 땅인 시베리아와 남극에서 발견되고 있는 수많은 아열대성 식물과 공룡을 비롯한 다양한 동물 화석, 석탄과 석유 자원은 궁창 위 물층의 역할을 잘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중요한 역할을 했던 궁창 위 물층은 노아 홍수 40일 동안 비가 되어 지구에 쏟아짐으로써 없어졌다. 즉, 노아 홍수 사건을 기점으로 오늘날의 지구 대기권이 형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사진설명> 궁창 위의 물층은 생명에 해로운 자외선, 엑스선, 감마선 같은 강한 우주선을 1차적으로 차단해 주는 역할을 했다. 그러나 궁창 위 물층은 노아 홍수 40일 동안 비가 되어 지구에 쏟아짐으로써 없어졌다. 즉, 노아 홍수 사건을 기점으로 오늘날의 지구 대기권이 형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현대과학 수수께끼 성경으로 풀려
궁창 위의 물층 때문에 생명체에 치명적인 강한 에너지를 갖고 있는 우주선이 지구에 들어오지 않았고, 사람들도 900살 넘게 장수할 수 있었다. 그러나 노아 홍수 이후 궁창 위 물층은 사라졌으며, 결국 강한 자외선의 유입량이 많아지면서 사람과 동물의 수명은 크게 단축되었다. 노아가 950세, 셈이 600세, 벨렉 239세, 아브라함 175세, 모세 120세, 다윗이 70세를 살았다. 성경에 나오는 인물들의 수명이 노아 홍수 기간을 기점으로 급격히 감소했음을 알 수 있는데, 궁창 위 물층이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했는지 알 수 있다.
오늘날 진화론 과학자들은 과거 존재했던 거대 동물들의 화석을 설명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거대한 공룡 화석, 날개 길이가 1미터가 넘는 잠자리 화석, 지구 도처에서 발견되고 있는 엄청난 양의 석탄과 석유 자원 등은 진화론적 방법으로는 해석이 불가능하다. 그러나 창세기의 내용을 성경에 기록된 대로 믿으면, 현대 과학이 풀지 못하는 수수께끼들이 쉽게 풀린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다. <계속>
/한윤봉 교수
전북대학교, 세계 100대 과학자
한국창조과학회 7대 회장
위 글은 교회신문 <704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