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날짜 [ 2012-09-19 13:23:20 ]
AD 1세기 말 또는 2세기 초 야브네(이스라엘 중부에 있는 도시, 그리스어로는 얌니아)에 있던 당시 유대인 최고 입법기구인 산헤드린의 나시(의장)가 가말리엘이었다. 가말리엘은 외부로는 로마가 억압해오고, 내분마저 심한 시기에 유대교 율법과 제의를 통일했다.
AD 70년 로마인이 예루살렘을 포위하여 공격하자, 많은 유대인이 성경에 나오는 고대 도시 야브네로 피신했다. 가말리엘은 예루살렘 산헤드린의 권위를 물려받은 한 유대교파 지도자가 되어 예루살렘 성전과 산헤드린을 빼앗기고 정치적 자치권마저 상실해 몹시 약해진 유대인의 신앙을 강화했다.
또 가말리엘은 유대인 정신적 지도자들이 샴마이 학파와 힐렐 학파로 갈라졌을 때, 그들 사이에 생긴 분열을 수습했다. 샴마이(Sammai) 학파가 엄격한 율법 해석을 지향한 것과 달리, 힐렐(Hillel) 학파는 율법 해석에 온건한 견해를 취했는데, 가말리엘은 샴마이 학파를 대표하는 인물로서, 안식일이나 결혼, 이혼 등 문제에 자유롭고 온건한 견해를 지녔다.
가말리엘은 자기의 권위를 내세워 유대력(Jewish calendar)을 통일하고, 이를 따라 축제일을 고정하여 모든 유대인을 더욱 굳게 결합하게 했다. 로마는 가마리엘을 원로(백성의 지도자)로 인정했고, 가말리엘은 자신이 일으킨 개혁 덕분에 원로로서 세력과 명성을 더욱 높였다. 가말리엘은 의장 재임 중에 반대자들에게 자주 독재를 휘둘렀는데 자신의 처남을 파문한 일도 있었다. 가혹한 처리 방식 때문에 한때 파면되었으나, 그 뒤 다시 권좌에 복귀했다.
가마리엘이 죽은 뒤에 그의 시신은 검소한 아마포에 싸여 매장됐다. 이는 평소 가말리엘이 많은 유대인 가족이 장례 후에 빈곤에 시달리는 것을 보고 값비싼 장례의식을 반대했기에 그의 희망에 따라 장례를 치렀기 때문이다.
위 글은 교회신문 <306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