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날짜 [ 2014-12-01 14:05:25 ]
하나님 아들로서 참을 수 없는 조롱과 멸시를 견뎌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다루는 영화를 보면 대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의 ‘육체적 고통’에 초점을 맞츈다. 사실 십자가에 달리는 고통은 인간이 겪는 고통 중에서도 최상에 속할 만큼 엄청난 것이기는 하다. 그러나 또 하나 간과할 수 없는 점이 바로 유대인 문화 코드로 봤을 때 ‘부끄러움’이다.
고대 근동 사료에서나 성경에서는 누구든지 나무에 달려 죽은 자는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죽은 것으로 이해했다.
결국 유대인들이 오늘날까지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지 않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나사렛 예수는 신성모독 죄라는 가장 무서운 죄를 지었기에 하나님께서 예수를 그냥 죽이지 않으시고 나무에 달아서 저주스럽게 죽였다고 그들은 믿고 있다. 그것이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이루어진 우리를 향한 사랑이라는 사실을 모른 채 말이다.
사복음서에는 예수의 마지막 고난 장면을 많은 분량으로 잘 소개하고 있는데 놀랍게도 기록의 대부분은 육체적인 아픔이 아니라 정신적인 아픔, 즉 조롱, 멸시, 천대, 창피로 말미암은 고통을 묘사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채찍질하는 장면과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장면 그리고 십자가에 못 박히는 장면을 영화나 드라마에서 강조해서 그렇지 실제로 성경은 그 부분을 한두 구절로만 기록하고 있다. 왜 그럴까?
사람은 대개 아픈 것은 참아도 부끄러운 것은 참기가 어렵다. 아담과 하와도 죄를 범한 후에 제일 먼저 부끄러워서 나뭇잎을 옷으로 만들어 몸을 가렸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어떤 부끄러움을 감수했는지를 이제부터 살펴보자.
첫째, 수제자 베드로에게 세 번이나 부인당하고 심지어 저주까지 받았다. 더욱이 가룟 유다에게 배신을 당해 팔리는 수모까지 겪었다. 결국 예수는 스승으로서 제자들에게 버림받았고 이 모든 것이 사람들에게 부끄러움을 당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된다.
둘째, 옷을 벗기웠다. 예수가 누구신가?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그런데 누가 감히 그의 옷을 벗겨서 창피를 주는가? 누군가가 이유 없이 내 머리에 손만 대도 참지 못하는 것이 사람의 본성이다. 그런데 수만 명의 군중 앞에서 옷 벗기고 수치를 당하였으니 이런 무례가 어디 있단 말인가?
셋째, 얼굴에 침 뱉음 당하고 뺨을 맞았다. 감히 사람이 하나님을 때린다? 하나님에게 침을 뱉고 조롱한다? 생각만 해도 무서운 짓이다. 조물주 하나님이 피조물 사람에게 멸시와 조롱을 받으신 것이다.
넷째, 머리를 흔들었다는 것이다. 당시 유대인 문화에서는 남을 조롱하고 놀리는 행위가 머리를 흔드는 것이었다. 이는 우리나라에서 혀를 날름거리는 것과 같은 행동이다.
다섯째, ‘정말로 메시아라면 십자가에서 내려와서 자신을 구해 보라’는 놀림을 받았다. 주변 많은 유대 지도자와 심지어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마저도 예수를 조롱했다.
여섯째, 하나님께도 버림받으셨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왜 나를 떠나셨습니까)?” 히브리어로 ‘떠나다’라는 뜻의 ‘아자브’라는 동사가 있다. 이것은 늘 함께 지내다가 이별하기 위해 해외로 멀리 떠날 때 쓰는 동사다. 비록 사람들은 떠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어떻게 하나님 아버지께서 아들을 버리고 떠나신단 말인가! 정말 사람들에게 조롱거리가 아닐 수 없다. 부모님이 대낮에 동네 사람들이 다 보는 앞에서 죄 없이 죽임을 당하고 있는 자식을 버리고 도망간다고 생각해 보라.
그래서 유대인들은 아직까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지 않으려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당연히 살리셨을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짜 인류를 위해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죽이시는 하나님의 사랑은 끝까지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마지막으로, 가시 면류관이다. 이는 왕의 머리에 똥칠을 하는 행위와 같다. “네가 왕이냐? 그래? 그럼 왕 노릇 해 보아라. 왕관은 써야 왕이지. 여기 가시관이나 써라”라는 표현들이 어울리는 분위기였을 것이다.
사복음서에서 예수의 고난 과정을 꼼꼼히 읽어 보라. 하나님의 아들, 평화의 왕, 창조주께서 당하신 부끄러움과 멸시와 천대받은 부분을 얼마나 자세하고도 길게 기록하고 있는지 보게 될 것이다.
위 글은 교회신문 <412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