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안과 밖 이야기] 생활 속 제2의 활동 공간으로 이용

등록날짜 [ 2014-12-15 14:58:18 ]

주거활동 등 곡식을 말리거나 여러 활동을 하는 곳

유대인은 저녁에 주로 하늘을 보며 기도하기도 해

 


<사진설명> 고대 이스라엘의 지붕 형태.

"
저녁때에 다윗이 그 침상에서 일어나 왕궁 지붕 위에서 거닐다가 그곳에서 보니 한 여인이 목욕을 하는데 심히 아름다와 보이는지라”(삼하11:2).


밧세바가 목욕을 어디에서 어떻게 했기에 다윗의 눈에 띄었을까? 이 또한 예루살렘의 지리와 지붕 문화를 모르면 도무지 알 수 없는 수수께끼다. 당시 광야나 산악지대에서 유목 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천막(장막)으로 만든 집에서 살았다. 반면에 성읍에 있는 도시 사람들은 흙과 돌로 지은 슬래브 집에서 거주했다.

유대 민족에게 지붕이란 곡식을 말리는 장소다. 여름에는 잠을 자거나 항상 기도할 수 있는 곳이다. 여인들은 지붕 아래, 마당 한가운데서 물 항아리를 두고 목욕을 했다.

다윗이 살던 예루살렘 성은 약간 경사진 산 위에 있었다. 그 때문에 다윗이 궁궐 지붕에 올라갔을 때, 밧세바가 목욕하는 모습을 훤하게 볼 수 있었다. 학자 중에는 밧세바가 이 사실을 알면서도 의도적으로 목욕한 것은 아닌지 의심스러워하는 사람도 있다. 아무튼, 예루살렘에 가서 현장을 직접 보면 모든 것을 실감할 수 있다

공기를 순환하려고 지붕 뚫어놔

무리를 인하여 예수께 데려갈 수 없으므로 그 계신 곳의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의 누운 상을 달아 내리니”(2:4).

중풍병자의 친구들이 지붕을 뜯었는데도, 어떻게 방 안에 있던 예수님과 사람들이 다치지 않았을까? 그리고 그 집 주인은 자기 집을 망가뜨리는 데 가만히 있었을까? 예수께서 중풍병자를 고친 중심 구절을 읽기에 앞서 유대 민족이 살던 지붕 구조에 의문점이 생기지 않을 수 없다.

이 또한 갈릴리 지방의 주거 문화를 잘 몰라서 생기는 의문이다. 우리나라도 지방마다 주거 문화가 조금씩 다르듯 이스라엘도 마찬가지다. 예수께서 활동하신 북쪽 갈릴리 지방은 여름에는 너무 더워서 낮에는 집 안에서 생활하기가 어려울 정도다. 그래서 지혜를 낸 해결책이 바로 지붕 구멍이다. 지붕 한가운데를 뚫어 구멍을 낸 뒤 더울 때는 지붕 뚜껑을 열어 공기가 순환되게 하고 추워지거나 비가 오면 닫는다고 한다. 이스라엘의 지붕 문화를 알고 성경 본문을 대하면 지붕을 뜯은 중풍병자 친구들의 행위가 크게 이상해 보이지 않는다.

고대 이스라엘에서는 지붕을 평평하게 만들어 집 안에서 할 수 없는 여러 일을 지붕에서 할 수 있게 만든 것이 특징이다.

제사와 기도를 하는 곳

무릇 지붕에서 하늘의 일월성신에게 경배하는 자와 경배하며 여호와께 맹세하면서 말감을 가리켜 맹세하는 자와”(1:5).

고대 이스라엘의 지붕은 다양한 목적으로 사용되었다. 중동에 사는 사람이라면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제사 드리거나 기도하는 장소로 지붕을 사용했는데, 특히 바알 신에게 분향하고 하늘의 일월성신에 절하는 장소로 많이 사용되었다. 이스라엘의 여름 밤하늘은 별과 달이 찬란하게 빛을 낸다. 더구나 전깃불이 없던 시대에는 어떠했을까?

이 성을 치는 갈대아인이 와서 이 성읍에 불을 놓아 성과 집 곧 그 지붕에서 바알에게 분향하며 다른 신들에게 전제를 드려 나를 격노케 한 집들을 사르리니”(32:29).

그리고 이러한 흐름은 유대인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그 대표적인 예가 베드로와 고넬료가 만나는 과정에서 잘 나타난다.

이튿날 저희가 행하여 성에 가까이 갔을 그때에 베드로가 기도하려고 지붕에 올라가니 시간은 제 육시더라”(10:9).

예수께서 종말의 때에 주의해야 할 여러 가지 명령 중에서 지붕 위에 있는 자에게 경고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아마도 지붕 위에서 기도하는 자를 지칭하였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지붕 위에 있는 자는 집 안에 있는 물건을 가지러 내려가지 말며”(24:17).

지붕 위라는 말을 여러 가지로 해석할 수 있겠으나 대체적으로 지붕 위에 있다는 말은 기도하는 것을 멈추지 말라는 말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아마도 마지막 때일수록 기도하는 일에 더 마음 쏟으라는 주님의 다급한 명령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지 않을까.

같은 장소라도 누구는 우상숭배를 하고, 누구는 절대자이시고 우리의 구세주이신 주님께 기도하고 있으니 과연 우리는 누구를 향해 기도하며 영원한 나라를 소유할 것인가.

위 글은 교회신문 <414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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