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안과 밖 이야기] 시신은 해 지기 전에 빨리 무덤으로 옮겨

등록날짜 [ 2015-08-03 12:54:30 ]

부자는 동굴 무덤에, 일반인은 직사각형 형태 땅속에 묻어


<사진설명> 예루살렘 기드론 골짜기 무덤들.

요셉이 시체를 가져다가 정한 세마포로 싸서 바위 속에 판 자기 새 무덤에 넣어두고 큰 돌을 굴려 무덤 문에 놓고 가니 거기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향하여 앉았더라”(27:59~61).


유대인의 매장 관습은 사라(23:2~4)와 라헬(35:19)의 경우처럼 사망 후에 되도록 빨리 시체를 매장하는 것이다. 신명기 2122~23절은 죽을죄를 지어 처형된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날(해가 지기 전) 매장해야 한다고 말한다. 안식일에는 매장이 허용되지 않았다.

유대인들은 매장되지 못하는 것을 사람이 겪는 큰 수치로 여겼다. 시편 기자는 자신이 당한 비참한 신세를 슬퍼하면서 사람이 밭 갈아 흙을 부스러뜨림 같이 우리의 해골이 스올 입구에 흩어졌도다”(141:7)라고 노래했다.

솔로몬도 몸이 매장되지 못하는 것을 가장 큰 불명예로 말하고 있다.

사람이 비록 백 명의 자녀를 낳고 또 장수하여 사는 날이 많을지라도 그의 영혼은 그러한 행복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또 그가 안장되지 못하면 나는 이르기를 낙태된 자가 그보다는 낫다 하나니”(6:3).

그들이 주의 종들의 시체를 공중의 새에게 밥으로, 주의 성도들의 육체를 땅의 짐승에게 주며”(79:2).

이 구절에 보면 시체들이 매장되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새와 짐승의 밥이 되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것은 모세 율법에서 불순종한 자에게 모세가 선포한 저주 가운데 하나였다(28:26). 또 다윗과 골리앗 사이에 주고받은 저주의 말이기도 하다(삼상17:44~46).

예레미야 선지자도 죽은 자의 시신에 가하는 이런 수치스러운 저주를 여러 차례 언급했다(7:33).

이런 이유로 예수가 십자가 위에서 죽자 아리마대 사람 요셉은 안식일 전에 매장하려 예수의 몸을 내어 달라고 빌라도에게 청했다. 안식일이 끝날 때까지는 어떤 매장 예식도 치를 수 없었기 때문이다(16:1;23:56).

가족묘에 묻히는 일은 성경의 주요 전통으로, 야곱이 가족묘에 묻어 달라고 유언하던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가 그들에게 명하여 가로되 내가 내 열조에게로 돌아가리니 나를 헷사람 에브론의 밭에 있는 굴에 우리 부여조와 함께 장사하라 이 굴은 가나안 땅 마므레 앞 막벨라 밭에 있는 것이라 아브라함이 헷 사람 에브론에게서 밭과 함께 사서 그 소유 매장지를 삼았으므로”(49:29~30).

부자든 가난한 이든 매장될 권리가 있었다. 어떤 시체든 방치되는 일은 없었다. 유족은 도움을 주려고 찾아온 친구들한테서 위로를 받았다. 장례를 치르기 전에 죽은 사람의 몸을 씻겼는데, 베드로가 되살린 다비다의 이야기는 그 좋은 예다(9:36~37). 동굴 매장은 땅을 사서 동굴 속에 선반과 틈을 만들 여유가 있는 부자나 할 수 있었다. 가난한 사람은 깊이 180직사각형 땅에 매장되었다.

나인성 장례 행렬에 기록된 것처럼 많은 사람이 무덤까지 상여를 뒤따라갔다.

성문에 가까이 오실 때에 사람들이 한 죽은 자를 메고 나오니 이는 그 어미의 독자요 어미는 과부라 그 성의 많은 사람도 그와 함께 나오거늘”(7:12).

직업으로 곡하는 사람들을 불렀는데, 그들은 맨발로 상여를 따라갔다. 장례 행렬은 묘지로 가는 도중에 시편을 낭송하려고 몇 번이나 멈췄다. 행렬 전이나 도중에 장송곡이 연주되었고(9:23) 횃불을 높이 쳐들었다.

시신에 향료를 바른 후 세마포로 된 특별한 천으로 감쌌다(19:39~40).

부활을 믿은 바리새인들은 여러 가지 매장 관습을 제시했다. 그 가운데 중요한 것은 두 번 치르는 매장 관습이다. 동굴에 매장할 때, 가족 매장지로 마련된 동굴에 벽을 뚫어 만든 평평한 선반이나 석관 또는 나무 관에 시체를 두었다. 1년 후 가족이 무덤에 들어가 뼈를 모아 납골당으로 알려진 작은 상자에 담고 그 위에 죽은 사람의 이름을 새기거나, 그 상자를 여는 사람에게 주는 경고문을 적어 두기도 했다. 그것은 죽은 사람과 함께 매장한 소장품을 훔치려고 도둑이 무덤을 도굴하는 것을 방지하려는 목적이었다.

위 글은 교회신문 <445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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