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날짜 [ 2016-01-18 15:03:00 ]
다양한 형태로 세력을 형성했으나 결국 정치적 메시아만 찾아
예수 그리스도의 공생애는 철저히 죄 아래 있는 인류에게 구원의 복된 소식을 전하는 동시에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하지만 당시 유대인은 강력한 정치적 메시아의 출현과 그 메시아로 말미암아 이뤄질 영광스러운 이스라엘의 지상 왕국을 고대하고 있었다. 특히 그 같은 기대감은 다양한 형태의 세력을 형성하는 배경이 되었고, 유대 사회 내에서 그런 유대교 세력의 입지와 영향력은 가히 절대적이었다. 유대교 세력은 자신들과 지향점을 달리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반대하고 핍박하기까지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예수께서는 바로 이 반대 세력들의 핍박을 통해 당신이 목적하시는 십자가 대속 사역을 성취할 수 있었다.
◆바리새파
‘분리된 자’, ‘구별된 자’라는 뜻의 히브리어에서 유래한 명칭이다. B.C. 4세기경에 개혁주의 신앙 집단인 ‘하시딤’(Hasidim)에서 마카비 혁명 기간에 수리아의 헬라화 정책에 대항해 조직화한 집단이다. 모세 율법과 장로의 유전(전승)을 중시하고 부활을 믿었다. 전통을 중시하고 율법주의를 고수하여 당시 종파 중 가장 큰 세력을 형성했다. 하지만 지나친 형식주의에 빠져 율법의 참정신을 상실하는 잘못을 범했다(마9:34;막7:3;빌3:5).
◆사두개파
다윗과 솔로몬 시대 대제사장 ‘사독’의 이름에서 유래한 명칭이다(삼하15:24). 성전 관리 책임을 사독 가문에 준 점을 감안해(겔40:46) 주전 160년경 하스모니안 왕조 때 일부 제사장이 사독의 후예라고 자처하면서 만든 당파다. 모세 오경만 인정할 뿐, 부활이나 내세, 천사, 사탄 등 영생과 영적 세계를 부인한 현실주의자다. 제사장 그룹을 독점해 산헤드린 공회의 다수 의석을 차지하고, 기득권층을 형성했다. 또 이들은 바리새파와 함께 산헤드린의 양대 세력이었다. 신앙의 순수성 상실, 윤리성 결여 등을 이유로 백성의 반발을 샀다(마3:7;행5:17).
◆열심당
‘시기하다’, ‘열정’이란 뜻의 히브리어에서 따온 명칭이다. B.C. 6년경 갈릴리 출신 유다가 로마의 호적 명령에 반발하여 세운 애국(국수)적 무장 독립 단체다. 선민사상과 민족우월주의를 근간으로 한 일종의 애국 정치 집단이다. 이들은 한때 예수를 정치적 메시아로 오해했다. 예수의 제자 중 가나안인 시몬이 이 당파 출신이다(마10:4;행21:38).
◆엣세네파
‘경건한 자들’이란 뜻의 히브리어에서 유래했다. 바리새파와 마찬가지로 그 기원은 ‘하시딤’에 두지만 이들은 엄격한 규율에 따라 금욕과 극단주의적 신비주의 종교 생활에 주력했다. 신학적 성향은 바리새파와 비슷하다. 모세 오경과 선지서를 더 중시했다. 당시 오염된 제사 제도를 배척했다. 철저한 금욕 생활, 공동생활, 은둔 생활, 성경 연구, 종말 신앙을 특징으로 한다. 사해 사본 등 소중한 사료를 남기기도 했다.
◆서기관
구약 왕정 때부터 존재했다. 특히 바벨론 포로기를 거치면서 율법 필사와 연구, 전승을 담당했다. 회당이나 성전에서 공문서 등을 작성한 전문가 집단이었다. 더욱이 율법을 전수하는 일에 남다른 역할을 했기에 율법사 또는 랍비로 불리기도 했다. 정치적으로 산헤드린 공회나 헤롯 정부 내 각종 기관에 속해 일종의 행정 관료가 되기도 했다. 이들은 특정한 분파에 속해야 한다는 원칙을 세우지 않았으나 통상적으로 바리새파 사람들이 주류를 이루었다.
◆헤롯당
헤롯 대왕이 로마 정부의 위임을 받아 팔레스타인 전역을 통치할 때부터 그의 왕조 몰락기(B.C. 37~A.D. 70년)까지 정치적 이익을 얻고자 모인 친로마 계열 정치 세력을 말한다. 이두매 출신 이방인인 헤롯은 선민의식이 강할 뿐 아니라 열화 같은 메시아 대망 사상을 지닌 유대인들을 통치하는 데에 늘 고심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헤롯을 추종하는 ‘헤롯당’은 예수를 자신들의 기득권에 도전하는 정치적 메시아로 여겨 탄압하는 데 앞장섰다. 유대교 분파 중에 ‘서기관’과 ‘헤롯당’을 한 부류로 여기는 경우도 있다. 물론 그들은 유대교 내에서 다양한 역할을 수행했지만 실제로는 독립된 분파가 아니었다. 사실 율법 필사를 주관하는 서기관 중에는 바리새파 출신도 있었고 엣세네파 출신도 있었다.
위 글은 교회신문 <468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