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날짜 [ 2016-04-18 13:15:29 ]
A.“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1:24).
바울이 말하는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란 무엇일까요? 혹시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구속 사역을 다 완성하지 못하시고 일부를 남겨 두셨기에 그 나머지를 바울이 마저 완수하겠다는 말일까요?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구원에 있어 “예수의 십자가 고난으로는 부족한 바가 있다”라고 말하는 것은 모두 적(敵)그리스도의 사상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희생의 공로는 무한하고, 그의 완전한 순종에는 아무것도 추가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피의 공로는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 어느 때든지 인간이 범하는 모든 죄를 대속하기에 충분합니다.
바울의 고난이 그리스도의 고난에 자신의 공로를 추가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란 도대체 무엇일까요?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부름을 받았습니다. 성경은 이런 사실을 ‘그의 몸 된 교회’(골1:24), ‘교회는 그의 몸’(엡1:23),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골1:18)라는 표현으로 밝히고 있습니다.
이처럼 교회는 지상에 있는 그리스도의 신비로운 몸입니다. 실로 교회는 그리스도와 ‘연합’하고 그리스도는 교회에 성령으로 ‘내주(內住)’하십니다.
예수님은 교회를 자신과 밀접하게 관련시키신 나머지, 다메섹 도상에서 바울을 부르셨을 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
사실 이때 사울은 예수님을 직접 핍박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을 핍박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교회를 치는 바울의 공격을 자신을 직접 공격하는 행위로 간주해서 교회를 자신과 동일시하셨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그리스도처럼 고난받는 종이 되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바울이 말하는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입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민족도 고난받는 종이 되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 소명은 이스라엘을 대표한 한 사람을 통해서 개인화되었습니다. 그 사람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지만 교회는 그리스도가 아닙니다. 따라서 고난의 성격에도 차이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고난은 대속을 위한 것이 아니고, 다만 그리스도를 증거하려 할 때 감수해야 할 대가를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의 ‘증인’을 뜻하는 단어, 마르투스(martus)는 ‘고난받고 죽임을 당한 순교자’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증인의 사명이 있는 그리스도인에게는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에 참여하는 의무와 특권이 동시에 있습니다.
만약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일을 저버리고 세속적 가치들을 탐한다면,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은 누가 대신 채울까요?
결론적으로 말하면,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고통 중에서 무엇이 모자라거나 만족스럽지 않아서 우리에게 넘어온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이어지는 성도의 고난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너희가 내 이름을 인하여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막13:13)이라 하여 우리에게 계속된 고난과 핍박이 있을 것임을 가르치셨습니다. 바울이 지금 당하는 괴로움은 그리스도께 이어지는 성도의 고난입니다.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는 말씀은 예수께서 머리가 되시는 몸 된 교회를 위하여 그리스도인에게 이어지는 성도의 고통을 기꺼이 그가 담당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바로 그런 고난을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기꺼이 당하고 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이런 고난에 동참하여 영원한 나라에서 주님과 함께하는 영광을 누릴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위 글은 교회신문 <476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