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안과 밖 이야기] 허랑방탕하게 산 탕자를 비유한 단어

등록날짜 [ 2016-06-13 16:00:34 ]

가난과 처참함의 상징으로 표현하기도 해 

<사진설명> 쥐엄 열매.

쥐엄나무 열매는 신약성경에서 돼지 밥으로 통한다. 아버지의 재산을 미리 받아 탕진한 아들이 돼지치기가 됐는데, 배가 너무 고파 돼지들이 먹는 열매 꼬투리라도 먹기를 바랐지만 풍족히 얻지 못했다고 한다.

그 후 며칠이 못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허비하더니 다 없이한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저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하나에게 붙여 사니 그가 저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저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15:13~16).

돼지 밥으로 언급된 이 열매가 바로 쥐엄 열매다.

탈무드에도 짐승 사료 가운데 하나로 쥐엄 열매를 소개한다. 기근이 심하게 들면 가난한 사람들이 이 열매로 배를 채웠다고 하니 가난한 사람에게는 일종의 구황작물이기도 했다.

쥐엄 열매는 콩꼬투리 모양으로 주렁주렁 열리는데, 껍데기는 딱딱해도 씹으면 꽤 달콤하다. 맛은 초콜릿과 비슷하지만, 끝 맛이 떫어서 그리 인기 있지는 않다. 지금은 건강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서, 초콜릿 대신 쥐엄 열매와 시럽을 찾고 있다. 비타민, 단백질, 무기질, 섬유질을 고루 갖춰 영양가가 높기 때문이다.

쥐엄나무는 이스라엘을 포함해 키프로스, 터키 등 지중해 지역에서 잘 자란다. 예루살렘 올리브 산(감람산) 중턱에 자리 잡은 통곡교회입구에도 쥐엄나무가 두 그루 자란다. 쥐엄나무는 히브리어로 하루브’, 영어로는 캐롭’(carob)이라 한다. 일명 메뚜기 나무로 통하는데, ‘하루브라는 이름도 하가브’(메뚜기)와 비슷해서 붙은 듯하다. 학자들은 침례 요한이 먹었다는 메뚜기(1:6)가 쥐엄 열매였다고도 추정한다. 그 때문에 쥐엄 열매는 침례 요한의 빵이라는 애칭도 있다.

쥐엄 열매는 한여름이 지날 무렵부터 갈색으로 완숙한다. 한꺼번에 많은 양을 추수할 수 있어, 가난한 이들의 먹을거리이자 짐승 사료로 사용된다. 고대에는 쥐엄 열매가 가난의 상징이었던 모양이다. 그러다 위상이 역전된 것은 쥐엄 열매 캐롭 씨가 다이아몬드 무게를 재는 캐럿’(carat)으로 발전했기 때문이다.

쥐엄 열매 씨는 예부터 무게를 재는 도구였다. 성경에 나오는 게라가 그 씨를 가리키는 도량형이다. 게라 하나는 0.45~55그램이었다고 한다. 씨앗 크기는 수박씨 두 배 정도로, 완두콩보다는 작다.

성경 속 탕자는 먼 나라로 갔다. 먼 나라가 어느 곳인지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이집트, 터키, 그리스일 가능성이 크다. 이 나라들은 문명이 상당히 발달했다. 탕자는 그런 곳에서 허랑방탕하게 지내다 끝내는 돼지 치는 자로 전락했다.

유대인들은 다른 족속의 종이 되는 것을 가장 큰 수치로 여겼다(25:42,54,55). 유대인은 예로부터 동족을 종으로 부리지 않았다. 그런데도 탕자는 우상숭배의 제물이 되는 돼지 치는 일을 해야 했고, 그 돼지가 먹는 쥐엄열매도 주는 자가 없어 돼지만도 못한 삶을 살았다.

돼지를 부정한 동물로 여긴 유대인들은 돼지고기를 먹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주검을 만지지도 않는 관습이 있었다.

돼지는 굽이 갈라져 쪽발이로되 새김질을 못하므로 너희에게 부정하니 너희는 이 고기를 먹지 말고 그 주검도 만지지 말라 이것들은 너희에게 부정하니라”(11:7~8).

따라서 타국일지라도 돼지를 친다는 것 자체가 매우 수치스러운 일이었고 돼지가 먹는 쥐엄나무 열매라도 먹겠다고 한 것은 그의 상황이 얼마나 비참했는지를 말해 준다.

우리는 집을 떠난 아들이 돌아오기를 바라는 아버지의 마음을 알아야 한다. 아들이 돌아오기만 바라고, 결국 돌아왔을 때 가장 좋은 것으로 환대하며 자녀로 받아 준 아버지의 마음은 곧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과 같다.

진짜 탕자는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를 망각한 채 계속해서 허랑방탕한 삶을 사는 모든 자일 것이다. 자신의 처지를 알고 돌이켰다면 더는 탕자가 아니다. 오늘도 자녀로 돌아오기를 바라시는 하나님 우리 아버지의 마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위 글은 교회신문 <483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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