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날짜 [ 2016-07-04 13:12:37 ]
말년에 각종 질병으로 비참한 최후를 맞아
<사진설명> 헤롯 대왕.
신약성경 여러 군데에서 ‘헤롯’이라는 이름을 가진 왕이 나온다. 그런데 그 헤롯은 동일 인물이 아니라 여러 사람을 지칭한다. 아버지 ‘헤롯’이 있고, 그의 아들들인 ‘헤롯들’이 있다.
따라서 성경을 읽을 때 혼동하지 않아야 한다. 이를 구분하지 않은 채 성경을 읽으면 역사적 사실이 바르게 배열되지 않고 뒤죽박죽 섞여 성경 본문을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한다. 헤롯 왕을 성경 사건과 관련지어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보는 일은 성경을 바로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준다.
로마는 이스라엘을 점령한 후 하스모니안 왕조를 몰락시키고, BC 37년 그들이 신임하던 헤롯을 새로운 이스라엘의 왕으로 임명했다. 헤롯은 왕이 된 후 많은 기존 세력과 싸워야 했다. 그는 친(親)로마적 성향을 띠고 있었기에 유대 지배 계층은 그를 좋아하지 않았다.
또 헤롯은 유대인이 아니라 이두미아인(에돔 사람)이었기에 유대의 바리새인도 그를 좋아하지 않았다. 따라서 헤롯은 유대의 기존 정치 세력, 종교 세력과 대립각을 세워야 했다. 그렇지만 헤롯은 뛰어난 정치력과 군사력으로 수많은 정적을 물리치고 왕권을 공고히 했다.
헤롯은 뛰어난 정치가요, 용감한 군인이었을 뿐 아니라 훌륭한 건축가였다. 헤롯은 위대한 건축물을 많이 세웠다. 사해 근처 동쪽 해변에 마카이루스(Makaerus) 요새를 지었다. 이곳은 침례 요한이 갇혀 있다가 처형된 곳으로, AD 66~70년 유대 전쟁 시에는 유대인들이 이곳에서 로마에 맹렬히 저항했다.
또 지중해 연안의 가이사랴에 아름다운 항구 도시를 건설했다. 원래 이곳은 항구를 만들 수 없는 곳이었지만, 헤롯의 지혜와 의지로 유명한 항구가 조성됐다. 이후 가이사랴는 로마 총독의 거주지가 되었다. 그 밖에 헤롯은 여리고 궁전, 헤롯 궁전, 헤로디안 성채를 지어서 이름을 남겼다.
헤롯의 가장 위대한 건축 업적은 예루살렘 성전 재건이었다. 역사학자 요세푸스는 성전 건축 공사를 헤롯의 가장 아름답고 위대한 업적으로 간주했다. 헤롯은 BC 19년에 성전을 기공했다. 성전의 주요 부분은 10년 만에 지었지만, 전체는 AD 63년경에야 완공했다. 이 엄청난 공사에 노동자 1만 8000명을 동원했다.
유대인은 헤롯이 성전을 재건한 것을 높이 평가했다. 그들은 헤롯이 유대인을 많이 살해한 일을 속죄하려고 이 성전을 지었다고 여겼다. 하지만 예수님의 예언대로 예루살렘 성전은 AD 70년에 로마군에 완전히 파괴됐다.
헤롯의 성격은 대단히 포악했다. 그는 자신의 왕권을 침해당할까 봐 극도로 불안해했다. 헤롯은 자신을 비난하는 자들은 물론이거니와 그러한 소문에 거명된 자들까지도 모조리 살해했다. 더욱이 헤롯은 통치 말기에 왕비인 마리암네 1세를 죽였고, 아들 세 명(안티파테르, 알렉산더, 아리스토불스)을 모반죄로 죽였다. 이로 말미암아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는 “헤롯의 아들이 되기보다 차라리 그의 돼지가 되겠다”고 빈정거렸다.
그러던 헤롯의 통치 말기 어느 날, 동방에서 박사들이 예루살렘으로 찾아와서 ‘유대인의 왕’이 나신 곳을 물었다. 헤롯은 박사들에게 ‘유대인의 왕’이 태어났다는 말을 듣자 광기가 발동했다. 따라서 자신의 정치적인 위협을 미리 차단하고자 잔혹한 명령을 내렸다. 베들레헴에서 태어난 두 살 아래의 남자아이들을 모두 죽이라는 명령을 내린 것이다.
헤롯이 베들레헴에서 메시아가 나시리라는 예언을 알면서도 이러한 명령을 내렸다는 것은 그가 메시아에 대한 강한 불신앙과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헤롯은 30년간 통치하다가 죽었다. 그의 사망 시기는 매우 정확하게 기록되어 있다. 요세푸스는 “헤롯이 로마 원로원에서 왕으로 임명받은 지 37년 만에 죽었다. 헤롯이 죽던 해에 월식이 있었다”라고 기록한다. 천문학자들이 조사해 본 결과 요세푸스가 말한 때에 실제로 월식이 있었다. 요세푸스는 헤롯이 열병, 가려움증, 궤양, 창자가 부어오름, 피부가 썩음 등 여러 중한 질병에 걸려서 비참하게 죽었다고 전한다.
위 글은 교회신문 <486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