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안과 밖 이야기] 예수님의 생애와 구속 사역을 저술

등록날짜 [ 2016-07-11 13:23:25 ]

각기 다른 시선에서도 동일한 맥이 흘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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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예수께서 행하신 이적과 구속 사역.


신약 성경 제일 앞에는 복음서(Gospel)’라고 부르는 책 네 권이 있다. 바로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이다. 이 책들을 언제부터 복음서라고 불렀을까.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마태에 의한 복음’‘마가에 의한 복음과 같은 명칭은 주후 2세기 중순이나 말경에 붙었다. 사실 누가 어떤 연유로 복음서란 명칭을 붙였는지 모르지만, 아마도 마가복음이 가장 먼저였을 것이다. 마가복음 11절에 복음이라는 단어가 나오는데, 이 단어에서 복음서명칭이 유래했다고 추정한다.

복음서는, 주후 30년경에 일어난 예수의 행적을 주후 60년경에 그의 제자들이 진술한 책이다. 복음서 저자들은 예수의 행적을 직접(마태, 요한) 혹은 간접적으로(마가, 누가) 목격했고, 그 내용을 기록했다.

그들은 성령님의 감동 아래 자신들의 관점에 따라 사실을 기술했다. 그들은 삼위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구원하고자 어떻게 일하셨는지를, 이 땅에 육체를 입고 오신 예수의 생애를 중심으로 썼다. 따라서 복음서의 주인공은 예수 그리스도시고, 또 그분을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이시고, 나아가 예수께 능력을 주신 성령님이시다. 결국 복음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삼위 하나님의 구속 사역을 말한다.
 
각기 다른 관점에서 서술

우리는 복음서에서 실제로 일어난 일을 목격하는 동시에 복음서 저자에 따라 조금씩 다르게 이해된 사실들을 만난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다르게 묘사했다는 말이 아니라 예수를 부각하는 방식을 달리했다는 뜻이다. 따라서 복음서를 읽을 때는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성을 충분히 염두에 두면서 저자들의 역동적 상황도 고려해야 한다. 즉 저자들이 주후 30년경에 일어난 일을 주후 60년경에 어떻게 이해했는지 생각하면서 읽어야 한다.

복음서를 읽을 때는 저자독자본문을 모두 알아야 한다. 이것을 다차원적 해석이라고 부른다. 해석자는 저자가 어떤 메시지를 전하려고 했는지, 독자가 어떤 상황에 처해 있었는지, 그리고 본문 자체가 어떤 언어학적 의미를 지니는지 포괄적으로 파악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정확하게 해석할 수 없다.

복음서 네 권은 고유의 목적을 띤다. 예컨대, 복음서들의 도입 부분은 각기 다르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은 예수의 출생으로 시작한다. 마가복음은 예수의 공생애를 바로 말하고, 요한복음은 시 한 편을 제시한다. 이러한 차이는 복음서 자체가 각기 다른 목적을 띠고 있다는 점을 나타낸다.

복음서는 저자 네 명이 각기 달리 기술했다. , 이들은 동일한 사건을 서로 다른 관점에서 해설한 것이다. 복음서를 자세히 연구해 보면, 마태복음은 유대적 성향,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은 로마적 성향, 요한복음은 헬라적 성향을 지녔다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다. 또 마태복음은 구약 언약의 성취를, 마가복음은 예수의 고난을, 누가복음은 성령님을, 요한복음은 사랑과 표적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각 복음서의 성격을 통전적으로 규정하기란 쉽지 않다

복음서 형성 과정

복음서가 형성된 과정도 정확히 알 수 없다. 18세기 이후 복음서 형성 과정에 대해 학문적 견해가 많이 제시됐지만 어느 것도 만족스럽지 않았다. 오늘날 신학자들은 복음서 형성 과정을 대체로 다음과 같은 견지로 말한다. 학자들에 따라 세부적인 면에서 조금씩 다르다.

마가복음이 가장 먼저 기록됐다. 구전 자료가 존재했는데, 마가복음과 구전 자료들을 토대로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이 기록됐다. 따라서 마태.마가.누가 복음을 공관복음이라고 한다. 이후 별도 자료에서 요한복음이 기록되었기에, 요한복음은 공관복음과 다른 독특성을 가진다.”

이 견해를 마가 우선설이라고 하는데 여전히 증명되지 않은 가설일 뿐이다. 복음서 네 권이 만들어진 과정은 아무도 모른다. 다만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섭리와 영감으로 이 복음서들이 기록되었다는 사실이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딤후3:16~17).

위 글은 교회신문 <487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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