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히브리어의 부활! 벤 예후다의 꿈과 도전

등록날짜 [ 2025-02-26 09:54:21 ]

고대 이스라엘 민족은 히브리어를 사용했다. 따라서 구약 성경이 히브리어로 기록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반면, 신약 성경은 헬라어로 기록되었다. 당시 유대인은 나라를 잃고 디아스포라로 흩어져 있었으며, 히브리어는 더는 공용어로 사용되지 않았다. 이후 히브리어는 오랫동안 일상 회화에서 사라졌다. 1900년대 초반까지 잃어버린 언어로 남아 있었으며, 음운과 발음만 전해졌다. 다만 종교적 연구와 의식에서는 여전히 사용되었고, 신성한 언어로 여겨져 일상에서 쓰는 것을 금기시했다.


19세기 말, 이스라엘의 언어학자인 엘리에제르 벤 예후다는 히브리어를 살아 있는 언어로 다시 만들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그는 1858년, 러시아 제국령 리투아니아의 루즈하니에서 태어나 전통적인 유대교 교육을 받았다. 유럽의 민족주의와 계몽주의 영향도 받으며, 언어가 민족 정체성의 핵심이라는 신념을 가지게 되었다.


예후다는 초정통파 유대교 가정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본래 이름은 엘리에제르 페렐만이었으나, 20대 초반 ‘유다의 아들’이라는 뜻의 엘리에제르 벤 예후다로 개명했다. 어린 시절, 예후다는 삼촌 집에서 성장했다. 삼촌은 독실한 유대인이었으며, 영민한 예후다를 랍비로 키우려고 유대교 학교인 예쉬바에 보냈다. 그러나 예후다는 종교보다 과학, 문학, 예술에 더 관심을 가졌다. 그는 몰래 히브리어로 번역된 『로빈슨 크루소』를 읽다가 발각되었는데, 당시 유대인 사회에서는 비종교 서적이 금기였다. 결국, 14세에 삼촌 집에서 쫓겨났다.


예후다는 추위를 피해 유대교 회당으로 피신했고, 그곳에서 부유한 요나스를 만났다. 요나스는 그를 집으로 데려가 양자로 삼았다. 요나스의 딸 드보라는 예후다보다 네 살 연상이었는데, 그에게 프랑스어, 독일어, 러시아어를 가르쳤다. 예후다는 언어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요나스는 영민한 예후다를 프랑스 파리 소르본대학으로 유학을 보냈다. 그는 파리에서 유대인 민족 운동에 감화되어 유대인으로서 정체성을 더욱 강하게 인식했다. 당시 여러 민족이 독립을 위해 활발히 민족 운동을 펼치고 있었고, 벤 예후다 역시 유대 민족의 국가를 세우고자 하는 꿈을 품었다. 


그는 유대인 국가를 건설하려면 모든 유대인이 공유할 수 있는 언어, 즉 히브리어를 복원해야 한다고 믿었다. 초정통파 유대교 교육을 받은 그는 구약 성경에 해박했으며, 성경에 기록된 약속의 땅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예후다는 결핵 진단을 받았고, 몇 년밖에 살지 못할 것이라는 선고를 들었다. 당시 결핵은 불치병이었으며, 치료법은 충분한 영양과 안정 그리고 맑은 공기와 햇볕을 쬐는 것뿐이었다. 


남은 시간이 짧다면 꿈을 이루는 데 집중해야 한다고 생각한 예후다는 예루살렘으로 가기로 결심했다.


예루살렘으로 떠나기 전, 예후다는 자신을 아들처럼 키워 준 요나스의 장녀 드보라와 결혼했다. 그는 불치병에 걸린 데다 오지로 이주해야 하는 처지를 생각하며 결혼을 사양했으나, 드보라는 끝내 그의 곁에 남겠다고 했다. 결혼 후 그녀는 일생을 남편에게 헌신하고 남편을 뒷바라지하였다.


예후다 부부는 예루살렘을 향한 여정을 시작했다. 당시 예루살렘은 오스만 제국의 일부였으며 무척 황폐하고 열악했다. 1881년, 두 사람은 마침내 예루살렘에 도착했다. 그러나 배설물이 방치된 거리에서는 악취가 풍겼고 전염병이 만연했다. 예후다는 신문 기자로 일하며 히브리어 사용을 권장하며 언어 복원을 위해 힘썼다. 그러나 유대인 사회에서는 그가 신성한 언어를 일상에서 사용함으로써 더럽힌다고 비난했다.


19세기 당시 유대인은 세계 각지에 흩어져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했다. 미국과 유럽계 유대인은 주로 이디쉬어(Yiddish), 중동계 유대인은 라디노어(Ladino)를 썼다. 이디쉬어는 독일어에 슬라브어와 히브리어 요소가 섞인 언어이며, 히브리 문자를 사용해 표기했다. 라디노어는 옛 스페인어를 기반으로 하며, 라틴 문자와 히브리 문자 두 가지로 표기되었다.


예후다가 도착한 예루살렘에서는 이디쉬어와 라디노어가 주로 사용되었고, 히브리어는 일상에서 쓰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2000년 가까이 사라진 히브리어를 복원하려는 의지를 꺾지 않았다. 예후다는 히브리어를 일상 언어로 되살리려고 구체적인 계획을 세웠다. 먼저, 자신의 가정에서 히브리어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의 아들은 근대 최초로 히브리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사람으로 자라났다.


그는 히브리어 어휘 확장에도 몰두했다. 고대 히브리어에는 현대 생활을 표현할 단어가 부족했기에, 새로운 단어를 만들어 내야 했다. 기차를 뜻하는 라케베트 같은 단어가 그렇게 탄생했다. 그는 고대 문헌에서 어근을 찾아 현대적으로 재구성했다.


히브리어 복원은 단순히 단어를 만드는 것에 그치지 않았다. 예후다는 고대와 현대 히브리어를 아우르는 사전을 편찬하여 유대 민족의 언어적 기반을 마련했다. 또 팔레스타인 지역에 히브리어 학교를 세우고, 모든 과목을 히브리어로 가르쳤다. 언어 부활은 교육으로 가능하다는 그의 믿음이 실현된 순간이었다.


그러나 그의 길은 순탄하지 않았다. 보수적인 유대교 지도자들은 히브리어를 세속적으로 사용하는 것이 신성모독이라고 여기며 강하게 반대했다. 예후다는 끊임없는 비난과 외면을 받았지만 흔들리지 않았다. 그에게 히브리어 복원은 단순한 언어의 부활이 아니었다. 그것은 민족의 영혼을 되찾는 길이었다.


1948년, 이스라엘이 독립했다. 오랜 세월 흩어져 있던 유대인에게는 공통 언어가 필요했고, 히브리어는 자연스럽게 이스라엘의 공식 언어가 되었다. 이는 벤 예후다의 노력이 결실을 맺은 순간이었다. 그의 사후에도 그가 남긴 사전과 언어 체계는 이스라엘 사회에 깊이 뿌리내렸다.


벤 예후다는 평생을 바쳐 히브리어를 복원했으며, 그의 노력은 오늘날 히브리어가 살아 있는 언어로 자리 잡는 토대가 되었다. 또 이는 성경에 기록된 예언의 성취이기도 하다. 하나님의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지며, 다시 오겠다고 약속하신 예수 그리스도도 곧 오실 것이다. 벤 예후다의 삶을 인도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길 또한 인도하실 것을 믿는다.



위 글은 교회신문 <888호> 기사입니다.


정한영 안수집사

신문발행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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