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날짜 [ 2025-07-01 23:14:44 ]
지금은 꽤 낯선 표현이 되었지만, 수십 년 전만 해도 아버지에게 편지를 올릴 때 “아버님 전(前) 상서(上書)”로 시작하여 “불초(不肖) 소생”으로 마쳤다고 한다. 여기에서 불초란 ‘아니 불’과 ‘닮을 초’ 자를 써서 “아비를 닮지 못한, 못나고 어리석은 자식”을 뜻한다. 자식이 자기 자신을 낮춰 부모를 본받지 못했다는 ‘불효자’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한 해, 두 해, 빠르게 흘러가는 세월이 참으로 무상하다. 나이가 들수록 세월에 대한 체감 속도가 빨라진다는 게 이토록 사실일 줄 몰랐다. 무럭무럭 자라는 아이들을 볼 때마다 흐뭇하면서도 나는 내 부모님만큼 좋은 부모인가를 돌아보게 된다. ‘불초’라는 말처럼 격동의 시기를 살아온, 아니 헤쳐 나온 내 부모님만큼 잘 살아가고 있는가를 비교해 보면, 아버지 어머니를 닮지 못한 성숙하지 못한, 철없는 내 모습만 도드라져 부끄럽기만 하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도 얼마나 ‘불초’인가.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찌어다”(벧전1:16). 참으로 닿기 어려운 당부이다. “또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고”(마5:40~41). 이 말씀 하나조차 주님 닮은 모습으로 순종하지 못하고 있다.
어느 교회든 주차난 때문에 주일마다 눈을 흘기거나 속상해하는 일이 있을 것이다. 어느 교회 중직께서는 교회 지하 맨 아래층, 맨 안쪽 구석에 차를 대고 올라오며, 그것이 그분의 신령한 자부심이라는 일화를 들었다. 그분의 얼굴을 알지도 못하나 주님 닮은 모습일 게 분명하다.
지난 주일만 해도 여전도회원들과 나눌 먹거리며 아이들 간식이며 두 손 가득 바리바리 들고 지하주차장 맨 아래층에서 대성전까지 갈 것을 생각하니 아찔했다. 이른 무더위에 이마에는 송골송골 땀이 맺히고 어린 두 아들을 데리고 올라가려니 몇 분 걸어 올라가는 것도 아득하기만 했다. 새가족을 섬기기 위해 지하 맨 아래층에 주차하겠다고 마음먹은 게 순간 후회스럽기까지 했다.
그러면서 ‘나는 언제쯤 주님 닮은 모습으로, 또 믿음의 식구들을 기쁨으로 섬길 수 있을까’ 생각했다. 하나님 아버지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내어 주는 한량없는 사랑을 베푸셨고,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피 흘려 죽기까지 영혼 구원을 위한 수고를 아끼지 아니하셨는데…. 참으로 불초가 아닐 수 없다.
“주님, 주님 닮게 도와주세요. 주차 자리 하나 기쁨으로 내어 주지 못하는 제가 불초입니다. 불초 소생은 오늘도 하나님 아버지를 닮지 못하여 이렇게 회개합니다.”
/현정아 객원기자
위 글은 교회신문 <906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