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날짜 [ 2026-04-02 16:54:03 ]
예수께서 십자가 중대사를 앞두고
기도하여 인류 구원 이룬 것처럼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길
세상 모든 일보다 기도를 우선해
내 영혼 지키고 영적생활 승리해야
겟세마네 동산. 주님이 땅에 엎드리셨다.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마26:38). 주님은 제자들을 남겨 두고 조금 나아가 홀로 부르짖으셨다.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같이 되었다(눅22:44).
제자들은 잠들어 있었다. 베드로, 야고보, 요한. 한 번도 아니고 세 번씩이나. 주님이 세 번째로 오셨을 때 말씀하셨다.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마26:41).
죄인 스스로 칼을 들어 짐승의 목을 따야 했던 레위기의 제사가 수천 년간 예표해 온 구속의 역사. 아담의 불순종 이후 죄와 저주와 사망과 영원한 지옥 고통 아래 신음해 온 인류를 위해 하나님이 독생자를 죽음에 내어 주신 그 밤, 제자들은 코를 골았다.
기도와 깨어 있음은 하나이다. 기도 없는 깨어 있음은 숨을 멈춘 채 살겠다는 억지에 불과하다. 제자들이 잃어버린 것은 다시 오지 않을 그 시간이었다.
죄의 무게를 모르면 보혈의 무게도 모른다
존 번연의 『천로역정』에 두 인물이 나온다. ‘크리스천’과 ‘순응하는 자’이다. 크리스천은 죄의 짐을 느꼈다. 심령이 찢겨 울며 떨었다. 책을 읽다가 더는 참을 수 없어 울음을 터뜨리면서 “내가 어떻게 하면 좋은가”라고 탄식했다. 율법의 정죄 아래 영혼이 갈기갈기 찢겼고, 귀를 손으로 막고 달리면서 “영생! 영생!”을 부르짖으며 좁은 길로 뛰어들었다.
순응하는 자는 달랐다. 죄의 짐도, 회개의 통곡도, 지옥 형벌에 대한 두려움도 없이 오직 천국의 달콤한 보상과 장밋빛 환상에 이끌려 가벼운 발걸음으로 신앙에 뛰어들었다. 십자가를 빼고 복음을 삼켰다. 죄를 느꼈는가, 느끼지 못했는가. 그 차이가 전부였다.
죄의 무게를 모르면 십자가의 필연성을 모른다. 십자가가 절실하지 않은 자에게 기도는 그저 교회 의식일 뿐이다. 겟세마네의 제자들은 달랐을까. 그들은 주님을 사랑했다. 그러나 사랑했음에도 잠들었다.
죄의 자각 없이 들어온 자는 처음부터 기도할 이유를 모르고, 주님을 사랑하는 자도 깨어 있지 않으면 결정적인 순간에 무너진다.
이 두 가지 영적 태만이 오늘날 교회 안에 함께 있다. 존 번연이 17세기에 그린 그 인물이 지금 이 자리에 앉아 있다.
주일마다 예배 자리를 채우고, 충성자 명단에 이름을 올리고, 헌금함 앞에 선다. 죄의 무게를 모르니 보혈의 무게도 모른다. 그러니 기도할 이유도 모른다. 주님은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막11:17)라고 하셨다. 참혹한 지옥 형벌에서 건져 주신 보혈의 은혜를 잊은 채 건성으로 입술을 움직인다. 행사 준비와 바쁜 일정을 핑계 삼아 무릎 꿇을 기회는 그 사이로 밀려난다. 바빠서가 아니다. 죄의 자각이 없으니 기도의 빈자리를 종교적 분주함으로 채우려 한다. 하나님 앞에 엎드려야 할 그 자리에 결국 내 열심과 내 수고가 앉아 있다.
살고자 하는 강렬한 영적 갈망 ‘기도’
영국의 존 웨슬리는 불을 토하듯 외쳤다. “사람들로 하여금 죄를 깨닫게 하기 위해 율법을 설교하라. 그리고 죄를 깨달은 모든 사람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믿음으로 값없이 죄 사함받을 수 있다’고 설교하라.”
율법 없이는 복음이 없다. 자신이 지옥 형벌을 받아 마땅한 죄인임을 직면하지 않은 자는 죄 사함의 보혈 앞에 무릎 꿇지 않는다. 지옥 형벌의 직면은 벼랑 끝 절망이 아니라, 비로소 압도적인 보혈의 은혜가 시작되는 지점이다.
레위기의 죄인이 칼을 들어 짐승의 목을 따던 순간, 그의 손이 떨렸을 것이다. ‘피 흘리는 저 짐승이 나였어야 한다’는 전율 앞에서. 그 떨림을 아는 자만이 그리스도의 보혈이 얼마나 압도적인 은혜인지를 안다.
자신의 완전한 무능 앞에 무너진 자의 입에서 비명 같은 기도가 터져 나온다. “살려달라!” 그 비명이 곧 기도이다.
스스로 파산자임을 깨달은 영혼 깊은 곳에서 비로소 불타는 소원이 터져 나온다. 기도의 뿌리는 종교적 습관이 아니다. 하나님의 긍휼을 향해 아우성치는 강렬한 영적 갈망이다.
“기도를 소홀히 한다는 것은 영적 소원이 죽어 버렸다는 무서운 표시이다.” 소원의 불이 꺼진 기도는 껍데기이다. 막연히 무언가를 원하는 수준, 기도 제목 목록을 힘없이 읽어 내려가는 행위, 이는 기도가 아니다.
“기도의 가마솥이 전에는 펄펄 끓었지만, 이제는 약해져서 점잖은 미지근함으로 바뀌어 버렸다.” 식어 버린 가마솥 앞에서 여전히 기도한다고 착각하지는 않는가.
다만, 나의 간절함이 하나님이 움직일 이유라고 오해하는 순간, 기도는 신앙이 아니라 주문이 되기도 한다. 사단은 기도하는 자리를 노린다. 잡념의 바다로 끌어들이고, “네 기도가 뜨겁고 간절하기 때문에 하나님은 반드시 응답하셔야 한다”라고 속삭인
다. 간절함을 공로로 내세우게 해 교만으로 넘어뜨리려 한다. 정욕을 채우려고 구하는 패역함도 경계해야 한다.
겟세마네에서 잠든 제자들처럼, 기도의 자리에서 졸면 진다. 그 밤 제자들이 잠든 대가는 홀로 십자가를 지신 주님이었다. 지금 우리가 잠든 대가는 무엇인지 생각해 볼 일이다.
<사진설명> 제자들의 기도 실패는 예수님을 부인하는 처참한 결과로 이어졌다. 시험에 들지 않도록 깨어 기도한 자만 주님을 부인하지 않고 믿음을 지킬 수 있다
기도는 할당이 아니라 항복이다
임종을 앞둔 한 하나님의 종이 말했다. “기도를 조금밖에 못한 것이 후회스럽습니다.” 사역자의 입에서 나올 수 있는 가장 슬픈 탄식이다.
그 후회가 우리의 몫이 되어서는 안 된다. 아직 늦지 않았다.
주님은 지금도 우리를 위해 간구하고 계신다. “그가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히7:25).
겟세마네에서 핏방울 같은 땀을 홀로 쏟으시던 그분이 지금 이 순간에도 보좌 앞에 서 계신다. 우리가 잠들어 있는 그 시간에도. 그 사실이 우리를 부끄럽게 한다. 기도하는 그분의 곁에서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왜 우리는 자투리 시간에만 무릎 꿇는가. 내 시간의 주권이 여전히 나에게 있기 때문이다. 삶은 내 욕망대로 통치하면서, 남는 시간에 엎드려 무언가를 얻어 내려 한다. 기도가 아니다.
“우리는 제일 좋은 시간을 기도에 바쳐야 한다. 우리의 시간과 힘에서 제일 좋은 부분을 기도에 써야 한다.” 이 말이 내 신앙 양심을 찌른다면, 아직 내려놓지 못한 주권이 남아 있는 것이다.
기도는 시간을 떼어 바치는 할당이 아니다. 내 삶의 모든 시간이 주님의 것임을 인정하는 항복이다. 내 뜻대로 일상을 영위하면서 무릎만 꿇는 행위는 기도가 아니다. 예수님이 삶의 주인이 되실 때 비로소 기도가 호흡이 된다. 그 호흡이 우리를 살린다.
다가오는 고난주간은 감상적인 동정표를 던지는 절기가 아니다. 겟세마네 제자들을 닮아서는 절대 안 된다. 주님이 세 번째로 오시기 전에 먼저 눈을 뜰 때이다.
위 글은 교회신문 <943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