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만든 적 없는 제도

등록날짜 [ 2026-05-21 13:55:01 ]

하나님은 태초에 가정을 만드신 후

사랑하고 존중하고 순종할 것 명령

세상 가정은 무관심 탓에 무너지나

주께서 가정에 주신 명령 순종하고

서로 사랑해 복된 가정 이루길 소망


한 식탁에 네 사람이 앉아 네 개의 화면을 본다. 같은 집, 같은 시간, 같은 밥. 그러나 다른 세계. 부엌에서 국이 끓는다. 식탁 위 그릇은 식어 간다. 아무도 입을 열지 않는다. 


누군가 한숨을 쉬지만, 옆자리에는 닿지 않는다. 옆자리도 화면을 보고 있다.


가족이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가장 멀어지는 시간이 식사 시간이 되었다. 사람을 묶어 주던 식탁이 사람을 흩어 놓는다.


초·중·고등학생 53%가 집을 떠나고 싶어 한다. 남편 넷 중 하나도, 아내 셋 중 하나도 마찬가지이다. 오늘날 집은 돌아가고 싶은 곳이 아닌, 벗어나고 싶은 곳이 되었다.


한국 가정은 지금 가장 풍요롭다. 한 세대 전 부모들이 보릿고개를 넘었으나, 그 부모들이 일군 자산이 자녀 세대로 흘러갔다. 한 끼 식탁에 한 세기 전의 한 달 치 양식이 올라온다. 그 풍요로운 한복판에서 식탁이 비고 있다. 사람의 자리에 화면이 들어선다.



<사진설명>가족을 하나 되게 하던 식탁이 오늘날은 그 반대가 되었다. 식탁은 부유해졌으나, 식탁 위 가정은 무관심 속에 초라하게 무너져 가고 있다.


강포가 땅에 가득했다는 그 시대(창11:6)에 성경은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있었더라”(마24:38)라고 말한다. 강포의 시대인 동시에 풍요의 시대였다. 결혼식이 끊이지 않았고 잔치가 그치지 않았다. 오직 한 사람만 산꼭대기에서 100년 동안 망치를 들고 있던 때에, 산 아래 마을에서는 잔치가 한창이었다. 가정이 무너진 곳은 풍요의 한복판이다. 부유한 식탁 위이다. 가난이 아니라면 무엇이 이 식탁을 비웠나.


사람이 만들지 않은 제도

최초의 가정은 회당에서 시작되지 않았다. 동산에서 시작됐다. 하나님은 엿새 동안 빛과 어두움을 가르고 바다를 모으고 별을 박으셨다. 마지막 자리에 사람을 두셨다. 자기 형상대로, 남자와 여자로(창1:27). 이 결합이 가정의 시작이었다.


가정은 인류가 살아가다 자연스럽게 생겨난 풍속이 아니다. 사회 계약의 한 형태도 아니다. 국가보다 앞서고 헌법보다 앞서 존재한 제도이다. 사람이 모이기 전에 이미 있었고, 법이 만들어지기 전에 이미 있었다. 만든 분이 따로 있다. 하나님이 아담을 보시고 한마디를 하셨다.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창2:18). 천지창조의 모든 장면에서 “보시기에 좋았다”라고 반복하시던 분이 처음으로 “좋지 못하다”라고 입을 여신 순간이다. 그러고는 돕는 배필을 지으셨다.


‘돕는 배필’이라는 말은 한국어로 옮겨지면서 종속의 뉘앙스를 입었다. 원어는 그렇지 않다. 히브리어 ‘에제르(Ezer)’는 하나님이 구약 시대 이스라엘을 도우실 때 쓰는 단어와 같다. 약자가 강자를 보조하는 도움이 아니라, 결정적인 순간에 생명을 살리는 도움이다. 동등한 자리이고, 생명을 살리는 구원이다.


아담이 그의 배필을 처음 마주했을 때 터뜨린 첫 마디가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창2:23)였다. 또 “아담과 그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창2:25)라고 했다. 부끄러움이 없다는 것은 거짓이 없다는 뜻이다.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 앞에서 자기 전부를 드러내고도 안전했다. 이것이 부부의 원형이다.


반면, 오늘날 우리가 맺는 결혼은 ‘계약’이다. 조건이 있다. 기간이 있다. 권리와 의무가 기록되어 있고, 깨질 때를 대비한 조항도 기록되어 있다. 한쪽이 조건을 어기면 다른 쪽이 해소를 요구할 수 있다. 그것이 계약이다.


성경이 말하는 결혼은 다른 단어이다. ‘언약’이다. 언약은 조건으로 맺을 수 없다. 죽음 외에는 갈라놓지 못한다. 한쪽이 조건을 어겨도 다른 쪽이 그 어김을 끌어안는다. 그 끌어안음 속에서 새 생명이 흘러나온다. 그래서 구약 전체가 하나님과 백성의 사이를 부부로 묘사한다. 신약은 한 걸음 더 나아간다. 부부의 연합이 그리스도와 교회의 연합을 비춘다고 적었다.



<사진설명>가나안 혼인 잔치에서 신부가 신랑이 내민 잔을 마시는 것은 두 사람의 혼인 언약이 성립되었음을 공식적으로 확인하고 받아들이는 행위이다. 하나님은 태초에 아담과 하와를 지으시며 가정을 만드셨고, 가정은 하나님이 언약으로 묶으신 공동체이다.


하나님이 언약으로 묶으신 공동체는 둘뿐이다. 가정과 교회. 다른 어떤 결합도 이 둘과 같은 무게로 묶이지 않는다. 사람이 묶은 매듭이 아니니 사람이 풀 수도 없다. 시대는 가정을 풍속으로 다루며 가정 제도를 시대에 맞춰 바꾸자고 주장하지만, 제정자가 바꾸지 않는 한 바뀌지 않는다. 제정자는 바꾼 적이 없다.


또 하나님은 “너희 각 사람은 부모를 경외하라”(레19:3)라고 했다. ‘경외(敬畏)’라는 단어가 무겁다. 구약에서 이 단어는 본래 하나님만 쓰는 단어이다. 그런데 그 단어를 부모에게 쓰라고 명하셨다. 부모가 하나님이라는 뜻이 아니다. 보이는 부모를 경외하지 못하는 자가, 어떻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경외하겠느냐는 뜻이다. 가정의 질서가 무너진 곳에서는 어떤 거룩함도 자라지 않는다. 이 제도는 사람이 만든 적이 없다.


닫힌 입, 들키지 않은 거짓말

가장 가까운 입에서 가장 깊은 칼이 나온다. 남편이 밤늦게 귀가한다. 아내가 현관으로 나간다. “오셨어요.” “응.” 그뿐이다. 남편은 신발을 벗고 안방으로 들어간다. 아내는 문을 닫고 거실로 돌아온다. 둘 사이에 묻지 않은 말이 쌓인다. 어디서 무엇을 했느냐. 왜 늦었느냐. 묻지 않는 이유가 있다. 궁금하지 않아서이다. 미움은 겨냥할 상대라도 있다. 무관심은 상대조차 하지 않는다. 부부 사이에 가장 무거운 죄가 무관심이다.


대속(代贖)이라는 단어가 있다. 무거운 단어이다. 일상에서 함부로 빌려 쓸 단어가 아니다.


그러나 가정에서 작동하는 한 가지 원리는 분명하다. 받을 자리에 있는 사람이 먼저 손을 내미는 것. 사과를 받아야 할 사람이 먼저 입을 여는 것. 이것이 무너진 가정을 다시 세우는 유일한 방식이다. 굴복도 양보도 인내도 아니다. 정당한 권리를 스스로 거두는 결단이다. 그러나 그 거리가 멀다.


자녀 앞에서는 그 거리가 더 멀어진다. 중학교 2학년 아들이 거짓말을 한다. 시험 점수를 부풀린다. 학원에 갔다고 말하지만 사실 친구들을 만났다. 거짓말이 거짓말 위에 쌓인다. 부모는 캐물을 수 있다. 호통칠 수 있다. 벌을 줄 수 있다. 그 모두가 정당하다. 그러나 정당하게 캐묻는 순간 진실은 더 깊이 묻힌다.


아들이 거짓말하는 이유는 부모가 두려워서이다. 그 두려움의 비용을 부모가 먼저 치르면, 거짓말은 갈 곳을 잃는다. 부모가 다그치면, 거짓말은 더 두꺼워지기만 한다. 자녀의 죄의 비용을 부모가 대신 지는 것. 가정에서 일어나는 가장 거룩한 사건이다.


이 사건은 어디서 왔는가. 2000년 전 갈보리. 한 사람이 단 한 번, 인류의 빚을 모두 갚았다. 받을 자리에 계신 분이 그 자리를 거두셨다. 단 한 번으로 충분했다.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10:45).



<사진설명>예수님이 2000년 전에 십자가에 피 흘려 이루신 대속의 은혜가 오늘날 냉랭한 가정에 참사랑의 온기를 불어넣는다.


우리는 그 일을 재현하지 않는다. 응답할 뿐이다. 남편이든 아내든 한 사람이 먼저 입을 열 때, 부모가 자녀의 두려움 앞에서 추궁을 멈출 때, 그것은 갈보리에 대한 응답이다. 그분이 단 한 번 지불하신 비용이 2000년 후의 식탁까지 흘러와, 식어 버린 국 한 그릇 위에 따뜻한 입김을 불어넣는다.


비 오지 않는 날, 열려 있던 문

산꼭대기에서 망치 소리가 들렸다. 100년 동안. 비는 오지 않았다. 산 아래 사람들은 그 망치 소리를 듣고도 듣지 않았다. 비웃음조차 없었다. 무관심이었다. 비웃음은 그래도 관심이지만, 무관심은 아무것도 아니다. 


노아 시대에 강포보다 더 깊은 죄가 무관심이었다. 산 아래 마을에서는 결혼식이 끊이지 않았다. 잔치가 그치지 않았다.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갔다. 풍요로운 시대였다. 그 풍요 때문에 산꼭대기의 망치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방주가 완성됐다. 누구든 방주에 탈 수 있었다. 두드리면 열렸다. 그러나 아무도 두드리지 않았다. 노아가 그들을 막은 것이 아니다. 그들이 올라오지 않았다. 올라오지 않은 이유는 미움 때문이 아니었다. 장가가는 일이, 시집가는 일이, 사업이, 내 일이 더 급했다.


비가 내리기 시작했을 때, 문은 그제야 닫혔다. 방주는 가정이었다. 노아의 가정이었다. 노아와 그의 아내, 세 아들과 세 며느리. 여덟이었다. 그 여덟이 100년 동안 망치를 들었다. 비가 오지 않는 산꼭대기에서.



<사진설명>노아 시대에 살던 사람들은 산꼭대기에서 들리는 망치 소리에 무관심했다. 육신의 풍요로움에 만족하며, 세상일에 분주하고 가족에게 무관심하다면 어느새 구원의 방주 문이 닫힐 날이 온다.


“집에 앉았을 때든지, 길을 갈 때든지, 누워 있을 때든지, 일어날 때든지”(신6:7). 노아의 100년이 곧 이 네 가지 호흡이다. 비 오지 않는 날의 망치질이 곧 일상의 강론이다. 거창하지 않다. 망치 한 번이 다음 망치 한 번을 부른다. 그 망치질이 멈출 때가 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열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향하여 네게 주리라 맹세하신 땅으로 너로 들어가게 하시고 네가 건축하지 아니한 크고 아름다운 성읍을 얻게 하시며 네가 채우지 아니한 아름다운 물건이 가득한 집을 얻게 하시며 네가 파지 아니한 우물을 얻게 하시며 네가 심지 아니한 포도원과 감람나무를 얻게 하사 너로 배불리 먹게 하실 때에 너는 조심하여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를 잊지 말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섬기며 그 이름으로 맹세할 것이니라”(신6:10~13).


광야에서는 매일 만나가 내렸다. 백성은 매일 공급하시는 분을 보았다. 

그러나 가나안에서는 곳간이 가득 찼다. 백성은 공급자를 잊었다. 보이는 손이 사라진 곳에서 사람은 자기 손을 믿기 시작한다.


오늘날 한국 가정이 그 길목에 서 있다. 끼니를 걱정하지 않게 된 집에서 식탁이 비었다. 평수가 늘어난 집에서 사람이 흩어졌다. 자녀가 더 좋은 학원에 다니는 동안 자녀의 마음은 부모에게서 멀어졌다.


망치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그러나 누군가는 짓고 있다. 비가 오지 않는 날, 산꼭대기에서. 한 식탁에서 먼저 입을 여는 사람. 자녀의 두려움 앞에서 추궁을 멈추는 부모. 식어 버린 국 위에 따뜻한 입김을 불어넣는 사람. 이들이 오늘의 노아이며, 이 좁은 식탁이 오늘의 방주이다.


방주의 문은 지금도 열려 있다. 산 아래 마을은 여전히 분주하다. 결혼식이 끊이지 않고 잔치가 그치지 않는다. 화면이 화면을 부르고, 일정이 일정을 밀어낸다. 망치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노아가 방주에 태운 사람은 여덟이었다. 더 태울 자리가 있었다.




위 글은 교회신문 <950호> 기사입니다.


정한영 안수집사

신문발행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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