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날짜 [ 2025-05-13 14:38:19 ]
피조물 위해 독생자를 주신 사건
하나님 아버지의 시선에서 보면
말도 안 되는 엄청난 낭비인 것
그러므로 주께서 인류 구원 위해
대속물로서 십자가에 죽은 것은
인류가 감당 못 할 놀라운 은혜
마가복음은 예수께서 이 땅에서 행하신 일을 통해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합니다. ‘그리스도’는 ‘기름 부음을 받은 자’라는 뜻이며, 구약에서는 선지자, 제사장, 왕이 기름 부음을 받는 자로 등장합니다. 마가복음 6장과 7장에서는 예수께서 구약의 선지자처럼 이적을 베풀고 말씀을 가르치는 자로서 그리스도이심을, 11~13장에서는 왕 되신 그리스도의 권세를 드러냅니다. 그리고 14장에서는 자기 자신을 대속물로 내어 주심으로써 완전한 제사를 이룬 제사장인 그리스도의 모습을 선명히 보여 줍니다.
마가복음 14장 1~11절은 고난주간의 셋째 날인 화요일에 있었던 사건입니다. 이틀이 지나면 유월절과 무교절인데, 유대 종교 지도자인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을 죽일 방도를 모의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명절 기간에 민란이 일어날까 두려워 그 시기를 피하고자 하였습니다(막14:1~2). 이스라엘 백성은 유대력의 첫째 달인 니산월 14일에 유월절을 지키고, 그다음 날인 15일부터 7일 동안 무교절을 지켰습니다(레23:6).
율법은 유월절, 칠칠절, 초막절 등 세 절기에 이스라엘의 모든 남자가 여호와 하나님 앞에 나아오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출34:23). 이 시기에는 팔레스타인 지역뿐 아니라 디아스포라로 흩어져 살던 유대인들까지도 예루살렘에 모였습니다. 예수님 당시 유월절에는 군중 약 250만 명이 예루살렘에 모였다고 전해지는데, 많은 이가 예수님을 선지자로 여기고 있었기에 종교 지도자들은 민중의 분노를 두려워했습니다. 이 장면에서 드러나는 중요한 진실은, 그들의 관심이 하나님의 뜻이나 구속 사역이 아닌 사람들의 평가와 반응에 쏠려 있었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가룟 유다의 배신 탓에 종교 지도자들의 계획은 예상과 달리 급속히 진행됩니다. 유다는 화요일 늦은 시각에 대제사장들을 찾아가 은 삼십을 받고 예수님을 넘겨주기로 약속합니다(막14:10~11). 이는 자신의 탐욕을 채우기 위해, 스승이자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팔아넘긴 행위였습니다. 은 삼십은 당시 노예 한 사람 값에 해당하는 금액이며, 예수께서 이 금액에 팔리신 사건은 이미 구약성경 스가랴서에서 예언된 바 있습니다(슥11:12).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이 우연이나 인간의 계략이 아닌, 하나님의 구속 사역 가운데 예정된 필연적인 사건임을 분명히 보여 줍니다.
침례 요한은 예수님을 가리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증언했습니다(요1:29). 유월절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구원하신 날을 기념하는 절기이며, 해마다 유월절이 되면 규례에 따라 어린양을 잡아 제물로 드렸습니다. 즉 유월절 어린양은 인류를 죄에서 구속하려고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미리 보여 주는 예표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유월절 전날, 곧 유월절 어린양이 잡히는 그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써 예언된 구속의 약속을 온전히 성취하셨습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의 뜻이 인간의 계획과 상관없이 하나님의 주권적인 계획대로 이루어짐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습니다.
향유를 부어 장사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
마가복음 14장에는 종교 지도자들의 예수님 살해 음모와 가룟 유다의 배신과는 대조되는 사건이 등장합니다. 일반적으로 이 사건은 마태복음 26장과 요한복음 12장에 기록된 내용과 동일한 것으로 보는데, 유월절 이틀 전이 아니라 엿새 전에 일어난 일입니다. 마가는 시간 순서에 따르지 않고 이 사건을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팔기로 결심한 구절 앞에 배치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생애 마지막 주간에 베다니에 있는 나병 환자 시몬의 집에 머무신 것으로 보입니다.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동쪽으로 약 3㎞ 떨어진 감람산 동쪽 경사면에 있던 마을입니다. 시몬은 자신을 고쳐 준 예수님께 감사하여 잔치를 열었고, 사람들은 함께 음식을 나누고 있었습니다. 그때 한 여인이 매우 값진 향유, 즉 순전한 나드 기름 한 옥합을 가지고 나아옵니다. 나드는 인도에서 자라는 감송향의 뿌리와 줄기에서 채취하는 고급 수입 향유였습니다. 당시 1데나리온은 성인 남성의 하루 품삯에 해당했는데, 여인이 가져온 향유는 삼백 데나리온, 즉 1년 치 품삯에 맞먹는 큰 값어치를 지닌 것이었습니다.
<사진설명> 한 여인이 예수님께 들고 나온 옥합은 나드 한 근이 들어있는 그릇이었다(요12:3). 이 한 근은 헬라어 원문에 1리트라(litra)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소량인 327g에 해당한다. 마가복음 강해 (41)
여인은 그 귀한 향유 옥합을 깨뜨려 예수님의 머리에 부었습니다. 그러자 어떤 사람들이 “무슨 의도로 이 향유를 허비하는가”라며 분노했습니다(막14:3~4). 마태복음에서는 이 ‘어떤 사람들’을 ‘제자들’이라고 기록하고 있고(마26:8), 요한복음은 그 장본인이 예수님을 팔 가룟 유다였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또 요한은 유다의 항의가 가난한 자들을 위한 게 아니라, 재물에 대한 탐심 때문이었다고 설명합니다(요12:6).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가만 두어라 너희가 어찌하여 저를 괴롭게 하느냐 저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막14:6). 여인의 행위는 제자들의 눈에는 돈을 낭비하는 일처럼 보였겠지만, 예수님께는 참으로 귀한 일이었습니다. 여인은 단순히 감사를 표현한 것이지만, 예수께서는 이 행위를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사를 미리 준비한 것”이라고 해석하십니다. 율법에 따르면 하나님께 번제를 드릴 때 향기로운 재물을 만들기 위해 포도주를 붓는 규례가 있습니다(민15:3~10). 이처럼 예수님은 자신이 재물처럼 우리의 죄를 위해 죽으실 것을, 이 여인이 향유를 부어 미리 준비한 것이라고 의미를 부여하신 것입니다.
이때 예수님의 심정이 얼마나 외롭고 쓸쓸하셨을지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오시기 전 이미 세 번이나 자신이 고난 받고 죽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고난과 죽음을 앞두고 대속물로서의 고통을 홀로 감내하고 계셨는데도 제자들 중 누구 하나 그 뜻을 깊이 이해하거나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한 여인이 향유를 부어 진심을 담아 예수님께 다가왔을 때 예수님께는 그것이 작게나마 위로가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여인의 입장에서는 주님께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을 아낌없이 드리며 주님을 높였기에 향유가 전혀 아깝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르면서도 출세할 생각만 가득했을 뿐, 진심으로 주님을 높이려는 마음은 부족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값비싼 향유를 부은 여인의 행동을 아깝게 여기며 분을 터뜨린 것이 아니겠습니까.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시선에서 본다면, 하나뿐인 독생자를 가치 없는 인간들을 위해 대속물로 내어 주신다는 것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일입니까. 지존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죄악된 인간에게 내어 주신 것은 참으로 엄청난 낭비 같아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 구원을 위해 대속물이 되셨다”라는 사실은, 우리로서는 도무지 감당할 수 없는 크고 놀라운 은혜인 것입니다.
위 글은 교회신문 <898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