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칼럼] 어느 죽음 앞에서(上)

등록날짜 [ 2025-08-20 10:53:29 ]

반드시 다가올 죽음은 구체적 실제

믿는 자에게 죽음이란 참안식이니

두려워하거나 머뭇거릴 이유 없어


한여름처럼 무덥던 6월 초의 어느 날, 서울신학대학교 신학과 은퇴 교수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선후배 교수들이 둘러앉아 지난날의 추억을 풀어내며 담소를 나누고 있던 그때 갑작스럽게 부고 문자 한 통을 받게 되었다. 은퇴 교수 중 가장 선배이신 교수님이 소천하셨다는 내용이었다.


“강○○ 교수님께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으셨습니다. 서울○○병원 장례식장 12호.” 지극히 규격적이고 일반적인 짧은 문장이었지만, 그 안에 담긴 무게는 그날따라 너무나 컸다. 우리 중 가장 연로한 교수님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으셨다는 것이 갑작스러운 소식은 아니겠으나 우리는 이상하리만큼 숙연해졌다. 아마도 그날 그 자리에 모인 이들 대부분이 70세, 80세를 훌쩍 넘긴 연로한 교수들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들 각자는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는 듯, 말없이 한숨을 삼켰다.


그날의 부고는 단순한 소식이 아니었다. 선배 교수님의 소천에서 왠지 모를 심한 아픔과 전율을 느낀 까닭은 신학대학교 공동체의 정체성과 죽음이 나에게도 다가옴에 대한 확실성 그리고 남겨진 가족들에 대한 안타까움과 지난날의 그리움이 함께 채색되어 다가오는 감성 때문이었으리라. 한 세대를 함께한 동료를 향한 진한 그리움이기도 했다.


이튿날, 그분 빈소에 문상을 다녀왔다. 거기서 남겨진 가족들의 아픔을 확인했다. 빈소에서 마주친 사모님이 나를 보자마자 눈물을 흘려서 너무나도 안타깝고 가슴이 먹먹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 선배 교수님은 나를 잘 챙겨 주고 힘이 되어 주셨다. 젊은 시절, 우리 아이들과 그분 댁에서 보낸 따뜻한 기억들도 주마등처럼 떠올랐다. 작별의 시간이었지만, 그 모든 기억은 영원한 친분의 증거였다. 사모님과 아내가 애틋하게 지내던 터라 더 마음이 아파왔다.


그런데 30년 넘게 교수생활을 함께한 세월 때문인지, 선배 교수님의 죽음 앞에 나는 처음으로 내 죽음이 ‘현실’로 다가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내 죽음이 다가온다는 사실이 나를 긴장하게 했다. 이전에 인식하지 못한 죽음의 메시지로 다가왔기에 그렇다. 그분 다음에 선배님 한 분이 계신데, 이제 내가 두 번째 나이 많은 교수인 것을 확인하며 바짝 다가온 내 죽음의 차례를 실감하는 찰나였다.


나는 지금까지 죽음에 대해 별생각 없이 머나먼 날의 일처럼 여겼다. ‘죽음이 오면 오는 것이지 뭐!’라며 ‘예수 믿으므로 죽음은 영광스러운 것’이라는 당연한 결론을 가지고 있던 터라 그냥 하나님 앞에 충성스러운 나날이 되길 바랄 뿐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다음이 내 차례일 수 있다는 현실에 부딪치면서 내 죽음을 직시했다. 죽음을 이론적으로만 알고 믿음으로만 안심하고 살던 내가, 그 실제를 눈앞에 마주한 것이다. 그래, 죽음은 현실이다.


죽음의 현실성과 아픔

죽음! 그건 더는 먼 훗날의 추상이 아니다. 그것은 언제나 지금의 사건이며, 현실의 그림자이며, 피할 수 없는 인생의 종착역이다. 막연한 미래가 아니라 구체적 실체이고, 언제 어디서 튀어나올지 모르는 비밀의 안개 속에서 마주해야 할 대상이다. 언젠가는 꼭 건너야 할 빨간 신호등, 피할 수 없는 막다른 인생의 끝자락이다.


죽음! 그건 믿는 자에게는 영광의 문이며, 천상의 초대장이며, 모두가 아는 것처럼 3차원의 세계인 인생에서 차원을 초월한 천상의 세계로 들어가는 순간이다. 주가 계신 하나님 나라이며, 앞서간 부모님과 뭇 성도들이 가 계신 영광스럽고 찬란한 최고의 피날레를 장식하며 영원히 살아갈 곳이다. 그러므로 그곳으로 가는 것을 두려워하거나, 무서워하거나, 망설이거나, 초조해하거나, 머뭇거릴 이유가 없다. 무엇보다 이 땅의 수고를 마친 후 영원한 안식을 누리는 시작점이다. 


그래서 ‘죽음은 더 좋은 곳으로 이사 간다’는 이야기를 사실로 되새기며 확실하게 믿기로 했다. 이게 죽음을 맞이하는 경건한 믿음의 사람들의 당연한, 일반적 자세일 것이다.


죽음! 그럼에도 죽음은 왜 슬프고 안타까울까! 그것은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 작별, 헤어짐, 떠남과 남겨짐의 아픔과 염려와 서운함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손을 맞잡고 흔든다. 눈물을 흘린다. 부르짖기도 하고, 통곡하기도 한다. 멍해지기도 한다. 그렇게 사랑스럽고 대견한 아내와 두 딸들과 사위들 그리고 귀엽고 똑똑한 꿀맛 같은 손주 녀석을 어찌 남겨 두고 떠난단 말인가.


그러나 나도 나의 부모님을 하늘나라로 보내 드린 후 몇 시간 있다가 식사를 했고, 내 현실로 돌아와 바쁘게 살다 보니 천국에 계신 부모님으로 소망하며 그냥 무덤덤하게 살아가고 있는 게 신기하기도 하고 다행스럽기도 하다. 이것이 믿음의 신비이다. 이별 속에서도 삶은 계속되고, 천국에 대한 소망은 일상의 버팀목이 된다. 아마도 우리 자녀들도 그럴 것이라는 생각에 위안을 얻기도 한다. 예수님을 믿는 자의 모습일 것이다. <계속>



/최종진 목사

前 서울신학대학교 총장

前 한국기독교학회장

위 글은 교회신문 <913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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