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말씀] 허물없이 그리스도 날까지 이르라

등록날짜 [ 2019-09-30 17:48:42 ]

빌립보서 1장 6~11절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 내가 너희 무리를 위하여 이와 같이 생각하는 것이 마땅하니 이는 너희가 내 마음에 있음이며 나의 매임과 복음을 변명함과 확정함에 너희가 다 나와 함께 은혜에 참예한 자가 됨이라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어떻게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주님이 하신 ‘착한 일’ 내 생애에 이루어

주님과 함께 그리스도의 심장 가지고

내 인생 최고 화제인 예수 피의 공로 들고

전 세계에 주의 복음 전하는 것이 우리 사명


우리와 똑같은 성정(性情)을 가진 사도 바울은 성령의 감동에 따라 서신을 쓰면서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어떻게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고 고백합니다. 이 구절을 읽을 때 스스로 묻게 됩니다.


‘석전아, 너 나이 먹어 죽을 때가 다 됐는데 네 심장은 누구 것이냐. 주님께서 이 많은 성도를 맡기셨는데 도대체 어떤 심장으로 그들을 대하니?’ 하고 물을 때, 무슨 할 말이 있겠습니까. 제가 너무 시원찮은 사람 같아 ‘왜 주님은 나 같은 사람을 쓰시나? 나 같은 사람을 쓰시려니 얼마나 답답하실까’ 생각하면 그저 눈물만 흐릅니다. 주님이 ‘나는 피 흘려 잔인하게 죽어도 좋으니 너만은 지옥 가면 안 된다’ 하신, 피 흘리신 주님의 심장이 제게 있는지 돌아보았습니다.


예수가 우리에게 하신 ‘착한 일’
세상에 ‘착한 일’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마태복음 5장 13절에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라고 했는데, 사람들은 희생하고 착한 일을 한 것을 마치 엄청난 소금 역할이나 한 것처럼 말합니다. 성경에서 어떤 예를 들든, 어떤 사건을 말하든, 주제는 전부 ‘예수’입니다. 그러면 성경의 주제가 예수라고 할 때,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신 ‘착한 일’은 무엇일까요.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 저가 두루 다니시며 착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자를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행10:38).


예수가 착한 일을 하셨는데 그분이 남의 집에 밀가루를 몰래 사다 주었나요? 가난한 사람에게 돈을 주었나요? 그분이 하신 일은 병 고치고, 귀신 쫓아내고, 죽은 자 살리고, 천국 복음을 전한 것입니다. “땅에는 질병, 저주, 고통, 죽음이라는 수많은 문제가 있지만 천국에는 없단다. 그러니 너희는 다 천국에 가야 해. 내가 너의 죄를 사해서 천국에 가게 하려고 이 땅에 왔어” 하시며 천국 복음을 전했습니다. 공생애의 첫 음성이 바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마4:17)는 것이었습니다.


왜 “천국 가라”고 하지 않고 “천국이 가까웠다”고 하셨을까요. 이 세상은 아담이 죄를 지은 후,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요일3:8)” 했기에 이 세상을 마귀 세력이 지배하게 됐습니다. 예수님도 ‘음부의 권세’, ‘마귀의 권세’란 말씀을 하셨습니다. ‘권세’는 능력과 다른 말입니다. 권세자의 말이 곧 법이니, 이 세상 권세자가 마귀이기에 예수 없으면 아무리 잘났어도 마귀 역사와 죄를 벗어날 길 없어 그 죗값으로 반드시 그 영혼이 지옥 가야 합니다.


마귀가 권세를 가지고 이 못된 짓 하는 것을 해결할 힘은 이 세상 나라, 곧 마귀 나라를 침략해 들어오는 하나님 나라, 천국이 점령해 들어와야 합니다. “회개하라”는 말은 “네 속에 있는 죄의 세계를 포기해라, 마귀와 동역하는 일을 그만둬라, 너는 불의의 병기로 그만 사용당해라, 빨리 회개하고 천국 사람이 되라, 천국이 침략해 들어갈 테니 마음 문을 확 열고 받아들여라”라는 어마어마한 ‘선전포고’입니다. 이것이 바로 ‘착한 일’입니다.


마귀의 지배에서 해방시키는 착한 일
어릴 때 누가 길을 물으면 안내해서 데려다주고, 무거운 것 들고 가면 꼭 들어다 주는 등 온갖 착한 일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 착한 일이 영혼을 구원합니까? 육신에는 그런 착한 일이 도움이 되나, 항구적이고 영원한 도움은 바로 우리를 마귀, 사단, 귀신, 죄와 지옥에서 해방하는 일이니 이것이 가장 착한 일이라는 말입니다. 예수께서는 마귀에게 눌린 자를 고치시는 착한 일을 했다고 했습니다. 만약 마귀가 당신을 밟고 있다고 생각해 보세요. 정작 본인은 밟힌 줄 모르니 벗어날 길 없습니다. 어릴 때 비가 오면 개구리들이 길바닥에 뛰어나와 돌아다닙니다. 그 개구리를 발로 밟으면 미끄덩하면서 개구리가 쭉 밀려 나가 죽습니다. 이처럼 ‘밟힌다’, ‘눌린다’는 말은 내가 벗어날 수 없는 상황에 결박당했다는 뜻입니다. 어떤 사람이 자기가 건강한 줄 알다가 갑자기 죽을병에 걸려서 의사가 “당신은 살길이 없고 꼭 죽습니다”라고 진단했다고 합시다. 그다음부터 삶의 의지가 팍 꺾이면서 마음이 꽉 눌려 어쩔 줄을 모르고 무서워 벌벌 떱니다. 아까까지는 괜찮았는데 ‘죽게 된다’는 자기 생각에 꽉 눌려서 그런 겁니다. 이처럼 마귀에게 눌린 자, 질병에 눌린 자, 불가능에 눌린 자가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최고의 불가능이 뭘까요?


우리는 죄를 지으면 죗값은 사망이기에 죄 아래서 멸망한다는데도, 죄를 재밌게 짓습니다. 청춘 남녀 간에 만나면 “왜 이렇게 좋은 만남을 못 하게 합니까?” 하며 성적으로 타락합니다. 지금은 못 하게 하지도 않습니다. 우리나라에 간통죄가 없어졌고, 낙태도 허용하니, 죄를 죄로 여기지 않는 시대가 됐습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어느 시대든 똑같이 죗값은 경중 없이 사망이라는 것입니다(롬6:23). 죄는 누가 짓게 합니까. 마귀가 짓게 합니다.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고 마귀에게 속한 자는 바로 마귀가 지배권을 가져 마귀의 권세로 지배합니다. 이렇게 죄로 지배하는 권세는 하늘의 권세가 와야 이깁니다. 그래서 예수 이름의 권세, 말씀의 권세, 성령의 권세, 예수 피의 권세는 죄를 지었으므로 말미암아 사망 권세를 가진 자, 마귀에게 억눌린 자를 해방하는 권세입니다. 이렇게 마귀 권세에서 해방하는 것이 주님이 우리에게 하신 ‘착한 일’입니다.


예수가 하신 착한 일이 이루어진 자
본문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라고 했듯,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이후 재림의 날까지 착한 일이 계속되는데, 이 착한 일은 우리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날까지 그리스도이신 예수가 이루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하고자 하는 착한 일이 우리 생애에 모두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그런 착한 일을 하나님이, 아들이, 성령이 다 이루어 내가 갖고 있으면서도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이 많습니다. 하나님은 으레 은혜 베푸는 분이시고 나는 은혜받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날 자식들이 부모가 사랑해도 감사할 줄 모르는 것처럼 말입니다. 부모가 죽을 뻔하고 낳아, 젖 깨물려 가며 먹이고, 진자리 마른자리 갈아 뉘며 자식 하나 훌륭하게 키우려고 자기 생애를 다 바쳐 기릅니다. 그런데 그 수고, 그 착한 일을 자식들이 알고 감사합니까.


예수께서 ‘착한 일’을 예수의 날, 재림의 날까지 이루어 가시는데 이 시대에 내가 주님의 착한 일을 만나지 못한다면, 그 착한 일을 이천 년 전부터 지금까지 열심히 하고 계시는데도 그 착한 일과 아무 상관 없다면 당신은 절망적인 사람이 되고 맙니다.


우리 예수 믿노라 하는 사람 중에도 “예수를 꼭 천국 가려고 믿느냐?”라고 말하는 이가 있습니다. 우리가 지옥 가지 말라고 예수님이 지옥 갈 밑천인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면 그 피의 공로가 헛되지 않도록 우리는 결단코 천국에 가야 합니다. 이것이 주님이 죽으신 십자가 피의 공로를 인정하는 분량입니다.


최고의 화제는 예수 피의 공로
주님이 내게 착한 일을 하신 사실이 내게 잊을 수 없는 사건이 되고, 내 속에서 언제든지 화제(話題)가 돼야 합니다. 지금까지 제가 잊지 못하는 일이 있습니다. 군대에서 교회에 간다고 온갖 핍박을 받았는데 하루는 새벽 2시쯤 상사가 나타나서 갑자기 발가벗고 밖으로 나오라고 합니다. 팬티만 입고 나가자 우리 부대 앞 냇가에 데리고 가더니 물속에 들어가라고 합니다. 그때가 양력 1월이라 얼음이 얼었는데, 그 얼음물 속에 들어가라고 합니다. 가지 말라는 교회를 왜 갔느냐는 것입니다. 들어가 물속에 앉으니까 처음에는 물이 목에 닿아 마치 목이 부러져 없어지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조금 있으니까 흐르는 물이 따뜻하게 느껴집니다. 주님의 은혜지요. 시간이 한참 지나도 계속 앉아 있으니 “야, 윤석전 빨리 나와” 하고 부릅니다. 그런데 가만히 있었습니다. 계속 대답을 안 하고 있으니 제가 죽기라도 한 줄 알고 결국 저를 데리러 물속으로 들어옵니다. 자기들은 추워서 떨고 난리를 냅니다. 그러더니 다시는 한겨울에 계곡물에 들어가라는 짓은 안 했습니다. 오십 년 전 일인데, 제 생애에 잊지 못할 화제입니다. 우리에게 최고 화제는 무엇이 돼야 할까요. 하나님의 아들은 창조자요 전능자인데, 무엇 때문에 말씀이 육신이 되어 고의로 이 땅에 와서 피 흘려 죽으셨을까요. 바로 내가 지옥 가서 당하는 그 견딜 수 없는 고통을 영원히 당해서는 안 된다고, 내가 당할 고통을 대신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죽으시기 위해서입니다. 바로 주님의 십자가 피의 공로가 제일 화제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어째서 이것이 아닌, 유튜브나 TV 연속극이나 인터넷에 나오는 죄악이 화제가 되고 있느냐는 말입니다. 영원히 사느냐 죽느냐의 문제를 해결해 주신 예수 피의 공로만이 우리에게 최고 화제가 되어야 합니다.


‘주님이 네게 이런 착한 일을 하셨는데 너는 주님께 뭘 하고 있느냐’는 양심의 질문에 답하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주님이 내 속에서 영원히 지울 수 없는 엄청난 사건과 화제를 만들어 나를 살리셨다면, 이 화제 때문에 주님의 은혜를 잊지 않고 행동하는 것이 신앙생활이라는 말입니다. 그렇게 신앙생활 하지 않는 사람들은 주님과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자기 속에 신앙생활 할 만한, 주님과 관계 있는 일이 없는데 무슨 신앙생활을 잘하겠느냐는 말입니다.


주님의 착한 일에 동참하는 자
7절에 “내가 너희 무리를 위하여 이와 같이 생각하는 것이 마땅하니 이는 너희가 내 마음에 있음이며” 할 때 또 저 스스로 묻습니다. ‘석전아, 너는 성도가 마음속에 얼마나 있니? 물론 있지. 그러나 바울처럼 주님처럼 애절하게 자기 목숨을 초개(草芥)와 같이 버릴지라도 만약 너희만 구원받는다면 하고 자기를 내던진 이런 마음이 있니?’라고 묻게 됩니다.


그런데 바울은 매우 자신 있게 말합니다. “나의 매임과 복음을 변명함과 확증함에 너희가 다 나와 함께 은혜에 참예한 자가 됨이라.” 예수 그리스도가 나를 착한 일로 사랑하신 그 은혜에 참예한 바가 됐는데, 내가 지금 매여 있고 옥에 갇혀 있어도 나는 복음 증거를 계속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너희가 다 나와 함께 은혜에 참예한 자가 됐다고 확증한다는 것입니다.


성도들이여, 내가 사라지는 어느 날, 내 육체가 썩어 없어지는 그날, 나는 천국에서 여러분이 한 명도 빠짐없이 다 오기를 애타게 기다릴 것 같습니다. 부탁하오니 한 사람도 주님의 착한 일을 만나지 못한 자 없기를 바라고, 그 착한 일의 주인공이 되기 바랍니다.


주님이 내 육체를 사랑했으면 아마 천년만년 살게 했겠지요. 육체의 때는 예수 믿을 수 있는 짧은 시간일 뿐입니다. 우리는 이미 죽은 것이 태어났습니다. 다윗도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시51:5)라고 고백했습니다. 죄악 중에 출생하고 죄악 중에 잉태했다면 이미 죗값은 사망이니 죽은 자 아닙니까. 숨 쉬고 살았다고 살아 있는 게 아니요, 내 영혼이 살아 있어야 산 것입니다. 그래서 내 인생의 주장자가 내 영혼이 되어야 하고, 성령이 내 안에서 내 영혼을 이끄셔야 한다는 말입니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롬8:6~7)라고 할 때 육신은 하나님의 법 앞에 굴복할 수 없습니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될 뿐이니, 하나님의 원수가 가는 곳이 지옥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을 영적생활을 하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자기 영혼을 사랑하는 사람, 하나님께서 자기 영혼을 사랑하심을 받아들인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피 흘리심의 은혜요, 그의 말씀이요, 성령의 역사입니다. 그런데 왜 신앙생활에 가장 잊을 수 없는 화제가 우리 삶 속에서 화제가 되지 않을까요. 그만큼 다른 화제가 내 속에 들어와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화제도 예수님이 나를 사랑하신, 착한 일 하신 은혜를 내 속에서 몰아낼 수 없습니다. 오늘 당장 죽음이 와도 포기할 수 없습니다. 옥에 갇혀도 매를 맞아도 가난해도 고통을 당해도 우리가 다 주님의 착한 일에 동참하는 자가 되고, 나는 그 착한 일로 은혜를 입었기 때문에 그 안에 있어야 하고 이 은혜로 내게 주신 착한 일에 동참하는 자가 될 때 은혜를 배신할 수 없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이 있는 자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어떻게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야.” 이 고백은 인간이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 심장을 가지신 분이 내게 오셔야 할 수 있습니다. 그 심장을 가지고 심장의 인격을 나타내고, 그 정신을 나타내야 합니다. 예수의 착한 일을 만났으니 주님의 심장이 내게 뛰게 도와주시고, 주님처럼 이웃에게 전도해 영혼 살리게 하옵소서!


내게 정말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이 있습니까. 주님이 “나는 찔려도 좋아 너는 허물에서 벗어나. 나는 상해도 좋아, 너는 죄에서 벗어나. 나는 징계받아도 좋아, 너는 하나님과 평화를 누려. 나는 십자가라는 저주의 나무에서 저주를 받아도 좋아, 너는 저주에서 해방돼. 나는 채찍에 맞아도 좋아, 너만은 건강해야 해. 나는 십자가에 피 흘려 죽어도 좋아, 너만은 지옥에서 구원받아야 해” 하시며 이를 행하셨습니다. 우리 주님이 내게도 이 착한 일을 할 심장을 주시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이 착한 일을 할 심장을 가지신 주님이 내 안에서 심장을 나타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회개는 주님께 내 죄를 맡기는 것인데 “네가 죗값으로 당할 고난이 크냐? 내게 다 맡겨. 너는 자유해!” 하시니 이것이 은혜요, 주님의 심장이라는 말입니다.


우리 교회가 전 세계에 1000교회를 짓고 있습니다. 그 목적은 교회가 주님이 착한 일을 하시는 일터요, 주님의 몸이므로 수많은 영혼이 죄와 사망과 지옥에서 구원받기를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가난한 나라에 교회를 지어 놓으니까 그곳이 학교가 되고, 동네 사람들이 다 모이는 장소가 됩니다. 사람들이 자기 집은 낡아 뜨겁고 태양 볕을 피할 길이 없으니 그 동네에서 가장 좋은 건물인 교회로 옵니다. 교회 오면 계속 말씀 듣고 계속 찬양하니 저절로 예수를 만납니다.


신앙생활의 목적은 육의 부유가 아닌 영의 부유
제가 부자 되라고 설교한 적 있습니까? 신약성경 복음서에서 요한계시록까지 부자는 망한다고 되어 있지, 부자가 복 받았다고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친히 “부자가 천국 가기가 약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기보다 어렵다”고 하셨으니 못 간다는 말입니다. 바늘귀에 어떻게 약대가 들어가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할 수 있나니 주를 위해 쓰게 만들면 된다는 것입니다. 육신도 주를 위해 사용한 것만 내 것이고, 사용하지 않은 것은 낭비요, 방탕입니다.


우리는 그저 복 주면 복이나 얻어 잘살려고 신앙생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는 그런 복을 주러 이 땅에 오신 분이 아닙니다. 우리는 육신 아끼려고 사는 사람이 아니요, 주를 위해 쓰려고 사는 사람입니다. 내 영혼의 때에 부유를 생산하려고 육신이 있습니다. 육신이 존재하는 가치를 모르는 사람은 육신을 위해 살다 육신을 위해 죽으면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니 지옥 가서 얼마나 허망하겠습니까.


누가복음 16장에 부자가 음부에서 “아브라함 아버지여, 내가 불꽃 가운데서 견딜 수가 없어요. 우리 집에서 얻어먹던 거지 나사로의 손끝에 물 좀 찍어 서늘케 해 주세요” 했습니다. 아브라함을 아버지라 불렀다면 선민이고, 율법 아래 있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는 지옥에 가서 견딜 수 없는 고통을 받으니,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선민의식만으로는 천국에 못 간다는 것입니다. 몇 년 믿었다는 경력으로, 모태신앙으로 천국 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착한 일로 내 속에 이루어진 피 공로가 화제가 되고, 그걸 꼭 붙들고 천국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행 갈 때도 최소한의 경비가 필요하듯, 내가 천국 가는 데 최소한 예수의 피는 기억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가장 낭패 보는 일이, 천국 갈 줄 알았는데 지옥에 뚝 떨어지는 것입니다. 이런 비참한 사람 되지 말기 바랍니다.


그리스도의 심장 가지고 복음 전하는 사명
우리는 예수 믿다 죽으리라 작정해야지, 예수 믿고 세상에서 말하는 부자 되고 잘 살리라 작정하면 안 됩니다. 성경에 그런 구절은 하나도 없습니다. 요한3서 1장 2절에 “네 영혼이 잘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한 말씀은 사도 요한이 버가모 지방의 부유한 권력가인 가이오에게 한 말입니다. 그 시대 사도 요한이 가이오에게 “내가 친서를 써 주고 그 사람이 친서를 들고 가거든 네 집에서 2~3일을 쉬게 하고 전도비를 주어 보내서 열심히 전도하게 하라”고 했습니다. 가이오가 사도 요한을 만나 큰 은혜를 받고 난 다음, 이처럼 계속 전도를 돕다가 자기 재산을 다 씁니다. 자기 전부를 다 써서 예수 때문에 가난해졌으니까 혹시라도 가이오의 믿음이 흔들릴까 봐 말합니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같이, 네가 전도비를 줘서 보낸 사람들이 밖에 나가서 진리 안에 행하는 범사가 잘되고 있어. 그러니 너는 헛수고가 아니고, 헛돈 쓴 게 아니야. 네 믿음 흔들리지 마. 강건하길 원한다. 네가 진리 안에 행한다니 내가 심히 기쁘다”라는 말입니다. 왜 이 말씀을 ‘네 영혼이 잘되면 사업이 잘되고 육체가 강건하리라’고 왜곡합니까. 고린도후서 8장 9절에 “예수께서 가난하게 된 것은 우리를 부요케 하려 하심이다”라는 말씀도 예수께서 가난하게 된 것이 우리에게 물질적인 부자(富者) 되게 해 잘살라고 했다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가 천국 하나님의 나라를 다 뒤로하고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와서 아무것도 없이 가난뱅이가 됐고, 자기 목숨도 피 흘려서 ‘내 살 받아 먹어, 내 피 받아 마셔’ 하며 자기 생명을 줘서 우리 영혼을 부유케 하셨습니다. 바로 영원히 천국에서 사는 부유를 주셨습니다. 예수 잘 믿는 사람이 부자 된 것 봤습니까. 성경은 다 영적 말이지, 육의 말이 없습니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인데, 하나님께서 사망의 소리를 하시겠습니까. 성경은 성령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된 책입니다.


다시 말해, 내 인생 최고 화제는 예수 피입니다. 그 화제 때문에 내가 살고 돈 벌고 사업하는 것입니다. 주님과 함께 그리스도의 심장을 가지고 피 흘리신 최상의 화제를 들고 주님을 모시고 신앙생활 하며 전 세계에 이 복음을 나눠 주는 것이 우리가 할 일입니다.


위 글은 교회신문 <643호> 기사입니다.

    아이디 로그인

    아이디 회원가입을 하시겠습니까?
    회원가입 바로가기

    아이디/비번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