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말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등록날짜 [ 2020-07-04 10:32:26 ]

마태복음 4장 17절

“이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가라사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하시더라”


살고자 하는 회개의 눈물이 넘치는 곳에

속죄받은 은혜로 감격의 눈물도

넘쳐 납니다. 


회개의 눈물, 감사의 눈물, 속죄받은 자의

기쁨의 눈물을 길 삼아 주님 품에

안기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회개치 못해 천국 못 간다면 참 안타까운 일

하나님은 의(義)로우시고 공의(公義)로우십니다. 하나님은 의로우시기에 죄인에게서 불의를 드러내시고 공의로우시기에 죄인의 불의를 심판하십니다. 하나님이 “회개하라” 하시는 것은 하나님 자신의 의를 정오의 빛같이 드러내면서 “하나님의 의와 반대되는 이념이 있으면 가지고 나와라”는 말씀으로, 죗값을 판단해서 형벌하려는 의도가 아니라 죄를 해결해 주시려는 것입니다. 이 지구상에서 우리를 가장 행복하게 해 주는 말씀은 주님이 이 땅에서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 처음으로 하신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는 말씀입니다. 천국이 가까웠는데 만약 회개치 못해서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면, 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하나님이 죄인에게서 불의를 드러내시는 이유는 “죄의 삯은 사망”(롬6:23)이라는 법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법은 하나님 자신이 정한 법이요, 하나님 자신도 이 법을 지키시기에 공의로우신 하나님이 “회개하라”고 할 때는 하나님 자신의 말씀을 기준으로 하여 그 말씀대로 살지 못한 불의한 죄를 드러내서 반드시 죗값대로 심판하신다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2장 10절에 “마귀는 밤낮 우리 형제들을 참소하던 자”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마귀는 하나님께 “인간이 이러이러한 죄를 지었는데 왜 심판하지 않습니까?”라고 밤낮 참소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자신도 불의를 바라보면 용납할 수 없으시기에 “회개하라”는 말씀은 죄를 용납하지 않으시겠다는, 죗값을 반드시 물으시겠다는 하나님의 결단이요, 피할 수 없는 심판을 말합니다.


또 하나님은 은혜와 사랑이 풍성하시기에 불의한 자를 심판하시되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게 십자가에서 대신 심판받게 하심으로 죄인인 우리 인간을 구원해 주셨습니다. 사람이 불의를 저질러 공의로운 심판 대상이 될지라도 하나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을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공의로운 심판을 받으셨으니 하나님은 공의도 이루시고, 은혜와 사랑도 이루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8:1~2).


말씀에 불순종한 죄 회개해 영원한 자유 얻어라

하나님께서 공의로운 심판을 위하여 회개하라 하셨으니 이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로 공의로운 심판을 대신 받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죄를 짓고 죄인 줄 알든 모르든 회개치 않으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이루신 구원의 은혜와 사랑을 절대 소유할 수 없고, 결국 자기 죄로 영혼은 죗값인 저주와 사망과 지옥 형벌을 분명하고 확실하게 받아야 합니다. 만약 여러분이 법정에 가서 마음속에 있는 죄까지 다 드러내서 “나는 이런 죄인입니다”라고 자백한다면 죄가 많아지는 만큼 형량은 분명히 늘어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는 죄를 드러내는 만큼 죗값은 경중(輕重) 없이 사망이기에 죄를 많이 깨달아 회개할수록 우리 죄를 사하신 주님의 은혜를 더 많이 받게 됩니다. 하나님 앞에 죄를 회개할 때 죄를 티끌만큼도 남김없이 들고 예수께 전가(轉嫁)해서 그가 짊어지고 대신 죽으시는 순간, 나는 그만큼 거룩해지고, 선해지고, 의로워지고, 하나님의 사랑을 수용하는 것임을 아시기 바랍니다.


누구든지 공의로운 하나님 말씀의 법 앞에, 의 앞에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고 자기 죄를 철저하게 자백하면 은혜와 사랑을 이루신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로 공의로운 심판을 대신 받으셨기에 죄에서, 심판에서, 형벌에서 자유해지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게 하실 것이요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요일1:9~10).


하나님은 우리에게 죄 있다고 말씀하셨는데 우리가 죄 없다고 고집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는 죄가 추가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 말씀이 그 속에 없는 사람’은 죄의 분명한 기준이 없으니 자신에게 죄가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신앙생활도 자기가 기준이 돼서 “내 믿음 내가 알아서 지키니 그만 좀 간섭하세요!”라고 불평합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라!”고 하면 듣기 싫어하고, 죄를 지적해 주며 “회개하라” 하면 “일주일 내내 세상에서 사느라 힘들었는데 왜 교회에서까지 회개하라 해서 사람을 힘들게 하십니까?”라고 항변합니다. 회개하라는 말씀은 당신을 힘들게 하려는 의도가 아니라, 당신의 육신이 끝나는 날 죄가 당신의 영혼에 얼마나 많은 고통을 줄지 생각할 때 하루빨리 회개하여 죄의 짐을 벗고 자유하라는 뜻입니다.


자기를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이 주신 사랑을 받아들이면서 하나님 말씀대로 살려 하고 그렇게 못 산 죄는 회개합니다. 아담에게 하나님께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2:17)고 하신 말씀은 사랑이지 결박이 아닙니다. 진실한 자유, 최고의 자유는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한 죄를 회개하여 죄 사함받아 죄와 저주와 사망과 지옥에서 해방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죄를 자백하면 신실하시고 정직하시고 절대 거짓말하지 않으시는, 절대 믿어도 되는 분이 우리의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불의에서 깨끗게 하실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죄를 자백하지 않습니까? 나를 죽여 지옥 보내는 죄, 하나님과 원수 되게 하는 죄를 철저하게 내놓는 것은 살고자 하는, 생애 본능에서 당연한 것입니다. 회개하여 영원한 자유가 여러분의 몫이 되기를 바랍니다.


참된 회개는 어떤 제사보다 영원히 크다

그러므로 최초의 인간 아담부터 대적하고 불순종한 죄로 인해서 받을 공의로운 심판을 하나님 자신의 아들에게 대신 받게 하셨으니 누구든지 살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피의 공로 앞에 죄를 회개로 해결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공의의 법 앞에서 참된 회개는 어떤 제사보다 영원히 크고, 자유와 해방을 누리게 합니다.


히브리서 10장 3~4절에 “그러나 이 제사들은 해마다 죄를 생각하게 하는 것이 있나니 이는 황소와 염소의 피가 능히 죄를 없이 하지 못함이라”고 했습니다. 제사는 죄를 생각나게 한다는 것입니다. 생각나게 한 죄를 예수가 오셔서 회개하라고 할 때 다 내놓게 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들을 때 죄가 생각나는 사람은 기도할 때 회개해서 종결해 버려야 합니다. 영원히 망할 죄를 한순간에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예배로 우리에게 주시는 복입니다. 제사나 섬기는 의식으로는 죄로 오는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를 절대로 무효 시킬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불평합니다. “제가 그래도 하나님 앞에 이만큼 했으면 복을 주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 하는 일마다 되는 것도 없고 가난하고 힘들고 어려운데 제게 무슨 복을 주었습니까?”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실 것입니다. “세상에서 육신이 하는 일이 형통하다고 해서 네가 죄 사함받고 천국 갈 수 있겠느냐? 내가 준 복은 육신으로 있다가 없어질 거품 같은 것이 아니라, 네가 죽어 지옥 갈 죄를 내 아들이 십자가에서 대신 담당해 그 피의 생명을 줘서 가난도 고통도 아픔도 걱정도 근심도 없는 천국에서 영원히 살게 하려고 영생을 줬다. 이보다 더 큰 복이 없는데 무슨 복을 또 달라는 것이냐?” 이 사람이 원하는 복은 하나님이 주시려는 회개를 통한 영생과 천국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육신이 형통하고 부유하고 육신의 요구대로 사는 것입니다. 왜 성경을 보고도 깨닫지 못합니까? 사복음서에서는 예수 생애를 기록해 놓았는데, 거기에 예수께서 하신 일이 무엇입니까. 나 위해 오셔서 내 죄 짊어지고 나를 죄와 사망과 지옥에서 구원해서 이 엄청난 영생과 천국을 주신 것입니다.


죄의 해결은 반드시 회개의 경험이 있어야 한다

또 어떤 사람은 “내가 세상에서 윤리적으로 도덕적으로 똑바르게 살고, 박애주의 사상을 가지고 많은 사람을 도우며 희생하고 살았는데, 천국이 있으면 내 것이고, 복이 있으면 내가 받아야 합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런 것으로는 하나님 앞에 심판받을 죄를 해결할 수 없으니, 반드시 죄의 해결은 회개의 경험이 있어야 합니다. 회개의 경험은 반드시 죄를 들고 공의로운 죄의 심판을 우리 대신 받으신 하나님 아들의 피 공로를 만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회개하면 예수 피의 공로 앞에 죄가 사라지고 예수 피 속에 있는 생명이 내게 가득하게 됩니다.


이 세상 수많은 사람이 의롭다고 박수를 해도 자기 영혼이 하나님 공의의 법에 저촉된 범법자라면 죄와 사망과 지옥에서 구원받을 수는 없고, 육신의 때를 지나 영혼의 때 천국에서 영원히 살 생명은 없습니다. 우리는 세상이 말하는 도덕으로가 아니라, 그보다 수준 높은 양심을 지나 하나님의 양심으로 사는 신령한 신앙 도덕으로 삽니다. 이런 사람은 구원받은 은혜 감사해서 예수 몰라 공의로운 심판을 받아 죄와 사망과 지옥에서 멸망할 영혼에 “예수께서 당신이 받을 공의로운 법적 심판을 십자가에서 짊어지고 대신 담당하시고 당신을 살렸으니 예수 믿고 천국 갑시다”라고 전도합니다. 이보다 박애주의를 초월한 강력한 사랑이 어디 있으며, 윤리와 도덕을 초월한 아름다운 사랑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것이 성령의 법으로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천국은 충성한다고 가는 곳이 아니다

어떤 사람은 말합니다. “교회에서 십일조를 많이 드리고, 이만큼 충성도 많이 했으니 나는 분명히 천국에 갈 것입니다.” 천국은 충성해서 가는 곳이 아닙니다. 죄 사함받아 천국 갈 자가 감사해서 충성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은 구원의 조건이 아니요, 예수 십자가 피의 공로 앞에 하는 회개만이 우리 구원의 조건입니다. 회개만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처절한 십자가 처형으로, 곧 피 흘려 죽으심으로 주신 속죄를 얻는 단 하나의 문이요 길입니다.


“2천 년 전에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우리 죄를 해결해 주셨습니다”라고 말할 때, 입으로는 “아멘” 하지만 회개치 않는다면 예수의 죽으심은 나와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회개만이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으로 반드시 자신의 죗값으로 죽어 지옥 형벌을 받아야 하는 그 죗값을 무효로 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저 천국에서 예수와 같이 영원히 살게 합니다.

그런데 자신이 무슨 죄를 지었는지 모르는 사람은 성경을 읽지 않고, 설교를 건성으로 들었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읽을 때 하나님 말씀의 의로움을 아는 만큼 내 불의를 찾게 되고, 말씀의 거룩함을 아는 만큼 내 더러움을 찾게 되고, 말씀의 선하심을 아는 만큼 내 악을 찾게 되고, 말씀의 신령함을 아는 만큼 내 무지를 발견하게 되고, 말씀의 사랑을 아는 만큼 내가 얼마나 사랑받지 못할 짓을 했는지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우리에게 말씀으로 나타내시면서 “너희가 이 말씀대로 살았느냐? 세상에 육신의 요구대로 살았느냐?”라고 물으실 때, 우리 불의가 드러날수록 ‘공의로운 심판 앞에 나는 불의해서 망할 수밖에 없구나’라고 깨닫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내가 길이요(요14:6)”라고 했습니다. 살아날 길을 따라가 보니 내가 받을 공의로운 심판을 예수가 십자가에서 해결했고, 나는 회개하고 이 사실만 믿으면 내 심판은 이미 끝이 났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수단과 방법으로는 얻을 수 없습니다. 다른 방법이 있었다면 왜 하나님이 아들을 죽였겠습니까. 하나님도 법대로 아들을 죽여서 사망의 법에서 나를 구원했다면, 이 은혜가 얼마나 큽니까.


죄인이냐 아니냐는 말씀대로 살았느냐로 판별

회개는 원죄적(原罪的) 죄인임을 고백하는, 처음 믿을 때 하는 일회적 회개가 있습니다. 다윗이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시51:5)라고 했듯, 아담이 지은 죄의 출발인 원죄를 말합니다. 또 한 가지, 이 땅에 살면서 자신의 정욕으로 범한 자범죄(自犯罪)를 계속 회개하는 반복적 회개가 있습니다. 우리는 반복적인 회개를 통해서 거룩해지고 성결해지고 주님을 닮아 갑니다. 죄인이냐 아니냐는,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께서 삶의 법으로 주신 말씀대로 살았느냐, 그렇지 않고 불순종하고 불법을 행했느냐로 판별됩니다.


어떤 사람은 “나는 교회에 다니는데, 죄를 좀 지었다고 지옥 가겠습니까?”라고 말합니다. 믿음은 회개에서 출발합니다. 우리 믿음은 죄에서 영원히 살고자 하는 것인데, 예수가 죽어서 살려 줬으니 이것을 내 몫으로 가지는 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은 반드시 회개한 경험이 있어야 하는데, 그냥 교회 다니는 것을 믿음이라고 생각한다면 이방 종교와 다를 바 없습니다. 나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인정하는 믿음, 회개하면 예수 십자가 피의 공로로 내 죄를 속죄함 받는다는 믿음, 그 피의 생명을 주셨기에 내가 그 생명으로 영원히 산다는 믿음, 영생과 천국을 얻었다는 믿음, 죄로 사망과 지옥에 가서 당할 고통이 끝났다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회개는 공의롭고 거짓이 전혀 없어야 한다

하나님 말씀이 공의롭고 거짓이 전혀 없듯이 회개도 공의롭고 거짓이 전혀 없어야 합니다. 만약 “나는 죄가 없다”고 주장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든다고 했으니, 하나님 말씀대로 공의롭고 의로운 심판을 분명히 받는다면 나도 공의롭고 거짓 없는 회개를 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 정도쯤이야” 하며 육신의 얄팍한 유익 때문에 죄를 짓고도 죄가 아니라고 빠져나가면 안 됩니다. ‘이렇게 해석하면 죄가 아니야!’라며 죄를 용납하는 것은 인간의 얄팍한 수작 같으나 어떻게든 죄를 그대로 두어 회개치 못하게 해서 그 죗값으로 지옥 보내려는 마귀의 궤계입니다.


회개는, 죄로 죽어 지옥 고통을 영원히 감당해야 하는 자가 죗값으로 당하는 영육 간의 고통을 공의로우시고 은혜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 공로 앞에 내어놓고 살고자 하는 다급한 열망의 절차입니다.


회개하지 않은 사람이 죗값으로 망할지라도 회개하는 자는 절대로, 영원히 망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진노 대상인 죄가 예수 그리스도의 공의로운 십자가 죽으심의 은혜로 완전무결하게 해결됐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알든 모르든 거역한 죄 회개하라

사랑하는 성도여, 하나님께서 주신 진실한 사랑의 말씀을 얼마나 알고 있습니까? 말씀을 모르면 말씀을 거역해 놓고도 죄인 줄 모릅니다. 하나님 말씀을 알든 모르든 거역한 죄를 회개하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피의 공로로 주신 구원의 은혜에 감사치 못한 죄도 회개하십시오. 당신이 지옥에서 받을 고통을 대신 갚으신 하나님 아들의 십자가 피 공로의 은혜를 알기나 합니까? 몰라서 싸구려로 취급하고 무시한 죄, 감사치 못한 죄를 회개하라는 말입니다.


당신이 육신의 소욕과 정욕으로 망하지 않게 하려고 성령이 오셔서 감화·감동하시고 깨닫게 하고 수많은 것을 여러분 속에서 가르치려 하나 무시하고 인정하지 않는 죄를 회개하십시오.


서로 미워하고 섬기지 못한 죄, 모든 언행심사에서 하나님의 요구를 무시한 죄, 마음과 생각으로 음란하고 외식하고 가증되어 온갖 정욕으로 범죄한 죄를 회개하십시오.


나태하고, 게으르고, 불만불평하고, 원망하고, 시기질투하고, 교만하여 방탕하고 방종한 모든 죄를 내 영혼이 하나님의 공의로운 법 앞에서 무서운 심판을 받기 전에 살기 위한 생존 본능을 회개로 드러내야 합니다. 


우리는 속죄받은 은혜가 얼마나 큰지 잘 모릅니다. 나는 간단하게 죄를 자백해서 주님이 나를 위해 죽어 주신 십자가의 공로 앞에 내놓으면 되지만, 주님이 내 죄를 짊어지고 어떤 고통을 당하면서 공의로운 심판을 받았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그 죽음이 내 죽음이고, 그 고난이 내가 지옥 가서 영원히 당할 고난인데···’라고 생각한다면 얼마나 큰 감사를 표현해야 하겠습니까. 


살고자 하는 회개의 눈물이 넘치는 곳에 속죄받은 은혜로 감격의 눈물도 넘쳐납니다. 통곡과 눈물로 회개해야 합니다. 그만큼 죄가 두렵고 무서운데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니 예수를 죽게 한 내 죄 때문에 울고, 내가 지옥 가서 당할 고통이 너무 고통스러워 울고, 내가 죽을 죽음을 대신 담당하시고 죽어 주신 그 공로 앞에 감사해서 울고, 속죄받으니 기뻐서 우는 것입니다. 그래서 회개의 눈물, 감사의 눈물, 속죄받은 자의 기쁨의 눈물을 길 삼아 주님 품에 안기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위 글은 교회신문 <683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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