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말씀] 하나님께서 택하신 일꾼 (2)

등록날짜 [ 2021-03-02 00:34:23 ]

고린도전서 1장 26~31절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 기록된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니라”


내 지식과 상황 제쳐 두고
명령받은대로 순종하는 사람을
주님은 복음 전도에 사용하시고
능력과 이적도 나타내게 하셔


주님은 미련한 자를 불러 쓰신다
본문에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하나님이 불러서 사용하는 사람들은 지혜가 특출한 사람, 세상에서 능한 사람, 공부를 많이 한 문벌 있는 사람이 아니다”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지혜 있는 자를 불러 쓰실 수 없었던 것은, 그 당시 십자가에 처형당한 예수를 믿는 일은 부끄러운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문벌 있는 사람들은 “행악자 중에 행악자로 십자가에 처형당한 예수가 어찌 우리의 구주, 우리 죄를 사하신 속죄주가 될 수 있겠느냐? 예수는 자기 죄를 짊어지고 처형당한 죄인일 뿐”이라며 예수를 안 믿습니다. 지혜가 많은 사람들 역시 자기가 예수를 전하면 사람들에게 무시당하고 멸시받고 천박스럽게 보일 것을 알기에 전하지 않습니다.


지금 시대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만 말하는 사람들에게 “얼마나 공부를 안 해서 할 말이 없으면 성경만 이야기하느냐”며 하나님 말씀을 전하는 것을 이 정도로 무시하고 오히려 무지한 사람들의 행태로 봅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이적을 나타내는 일을 무지한 사람들이나 하는 일로 치부하기도 합니다.


예수께서는 신분이나 학식이나 자랑할 것이 없는 사람들, 세상에서 별 가치 없는 사람들을 제자로 부르셨습니다. 제자 하나하나의 면모를 보면 ‘과연 저 천박한 사람들이 하나님의 아들이 이루신 인류 구원의 대역사를 전하는 초석이 되겠는가’ 생각될 만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마가 다락방에서 성령의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에 나가 복음을 전할 때 예루살렘이 소동하며 “저들은 갈릴리 출신이 아니냐?”라고 놀랍니다. 당시 갈릴리는 아주 천박하고 소외된 동네요, 갈릴리 사람은 유대 민족 내에서도 버림받을 만큼 무시받던 때였습니다. 그렇기에 예루살렘에 각국의 사람들이 모였을 때 제자들이 전하는 복음을 각각 자기 나라 말로 알아듣자 “저들이 무슨 학문이 있기에 우리가 다 자기 나라 말로 알아듣는가”라며 굉장히 놀라며 의아해합니다. 또 성전 문 앞에서 얻어먹던 앉은뱅이를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일으켜 걷게 하자, 도대체 저들에게서 어떻게 이런 이적이 일어날 수 있느냐며 놀랍니다. 성경 말씀대로 지혜 없는 자들을 통해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고 능하지 못한 자들을 통해 능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주님이 부르신 제자 중에 두 사람만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마태복음을 쓴 예수의 제자 마태는 유대인의 세금을 뜯어다가 로마에 바치는 세리였기에 유대인에게는 매국노 같은 존재로 사람 취급도 받지 못했습니다. 예수께서 그의 집에 가셔서 많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자, 사람들은 예수가 왜 죄인을 상대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고 하셨지만 그들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류 구원을 위해서 아들을 보내 죄인을 찾아 회개시키고 아들의 목숨을 대속물로 주려 하신 구속 사역의 본질을 전혀 몰랐기 때문입니다.


제자 유다도 보십시오. 주님은 유다가 항상 자기와 다른 생각을 하고 또 자기를 팔아넘길 자라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데리고 다니셨습니다. 우리도 유다와 같이 죄인일 뿐입니다. 주님이 나를 위해 대신 죽을 만큼 내가 죄인이라고 인정할 때 내가 그 십자가 피의 공로로 의로워지는 것이니 우리는 어느 누구도 판단하거나 욕할 권한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불러 쓰신 사람은 저변에 있는 사람들로, 무시당하거나 인정받지 못하고 꿈이나 소망이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당시 장로들이나 바리새인들을 제자로 불렀다면 아마도 예수를 율법을 폐하는 도전자로 여겨 절대 예수를 따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청년 사울처럼 예수를 신성 모독죄로 죽이는 것이 당연하고 예수 믿는 사람도 똑같이 정죄해서 죽이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해 예수를 좇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께서 세상에서 무지한 사람들을 부르신 까닭은 그 사람들만이 예수를 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와 여러분이 예수를 믿고 주님이 쓰시는 사역자가 된 것을 주님의 이름으로 축하합니다.


믿고 순종해야 주께서 일하셔
주님은 자기가 택하신 자들이 주님의 사역을 계속 이어 가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내가 주님의 택함을 받고도 혹시 나에게서 주님의 사역, 즉 예수의 복음 전파가 중단된다면 이것은 참으로 심각한 일입니다. 주님은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복음이 증거되기를 원하시는데 내게서 복음 증거가 멈춘다면, 주님이 나를 택하고 부르신 의미가 사라지고 맙니다. 나를 통해 예수 믿고 구원받아야 할 수많은 사람이 지옥 간다고 할 때, 이 어마어마한 절망과 낭패와 끔찍함을 어찌하겠습니까.


만약 사도 바울이 로마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지 않았다면 지금 복음 증거가 어디까지 되었을까요. 초대교인들은 모이면 기도하고 흩어지면 전도했는데, 현재의 내게서 복음 증거가 중단됐다면 기독교는 종말이 오고 말 것입니다. 복음은 나를 통해 끝없이 증거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런저런 이유로 전도 못 하고 능력이 없어서 전도 못 한다고 한다면 주님이 당신을 쓰실 수가 없습니다.


예수께서는 자신이 택하신 자들에게 이적과 표적을 나타내시며 자기가 쓰고 있음을 알게 하시고 위로하십니다. 제가 연희동에서 교회를 개척할 때, 그 동네는 부자만 살아서 걱정이 됐습니다. ‘물 나고 곰팡내 나는 이런 지하실 교회에 사람들이 오겠나. 혹시 온다고 해도 나보다 공부도 많이 하고 사회적으로 훌륭한 사람들일 텐데 내가 어떻게 저들을 설득시킬 수 있을까.’ 그러나 성령 충만하게 기도하고 강단에 서면 앉아 있는 성도들이 영적으로 불쌍해 보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으면 안 될 자들이요, 병을 고쳐 주지 않으면 안 될 자들이요, 회개시키지 않으면 죄 아래 살다 죽어서 지옥 갈 자들이었습니다.


주님이 주신 사명을 가진 자에게서는 반드시 능력과 이적과 성령의 역사로 회개와 속죄 역사가 나타나면서 소동이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교회 안에서, 말씀을 듣는 자들의 심령 안에서 소동이 일어나는 것은 바로 주님이 나를 쓰시고 있다는 증거요, 위로입니다. 죽을병에 걸린 자를 위해 기도해 주고 그가 치료를 받으면 ‘나는 할 수 없으나 주님 말씀을 믿고 순종했더니 이런 역사가 일어나는구나. 확실한 표적으로 역사하시는 것은 나를 쓰신다는 증거요, 나를 인정하신다는 위로구나’라고 생각할 때 그것이 믿음이 되고 힘이 되고 주의 사역을 하는 데 담대함이 생기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과거에는 예루살렘에 가면 붙들려 죽을지 모른다고 두려워했습니다. 그러나 주님 말씀대로 마가 다락방에 모여 기도하고 성령 충만하여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에 나가 복음을 전할 때 “형제여, 어찌할꼬! 우리가 어찌하면 구원을 얻겠느냐” 하며 삼천 명, 오천 명씩 회개하고 돌아오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수많은 병자가 고침받고 귀신들이 떠나가는 현장을 바라보며 “정말로 주님이 우리에게 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셨다. 주님이 하신다”라고 생각했으니 얼마나 용기와 담대함이 넘쳤겠습니까? 될 것을 미리 알고 시작하면 담대합니다. 주님이 내게 주신 말씀을 그대로 믿고 행동하는 것은, 이미 이루어질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저는 설교할 때 주님의 애타는 심정을 가감 없이 전합니다. 성령의 감동대로 거침없이 말할 때 듣는 자들이 회개할 것을 확실히 믿기에 담대하게 전하는 것입니다. ‘안 되면 내 체면은 어떻게 하지?’ 하는 사람은 주님이 안 쓰십니다. 주님이 써 주시면 그저 써 주시는 것에 감사하고, 안 되는 것은 주님이 책임질 일이고, 나는 그저 주님이 시키시는 대로 하면 되는 것입니다.


내게서 주의 사역이 계속되어야
주님은 자기가 택하신 자들과 함께하신다는 것을 확실히 믿게 하시려고 주님이 쓰시는 자들을 통해 능력을 나타내십니다. 성령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방언을 말하면서도, 믿는 자가 귀신을 쫓아낸다는 말씀을 믿지 않는다면 그것은 어불성설입니다. 성경은 반드시 믿는 자들에게 표적이 따른다고 했습니다.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찌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 주 예수께서 말씀을 마치신 후에 하늘로 올리우사 하나님 우편에 앉으시니라 제자들이 나가 두루 전파할쌔 주께서 함께 역사하사 그 따르는 표적으로 말씀을 확실히 증거하시니라”(막16:17~20).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신 것은 정죄를 받으셔서가 아니라 고의로 우리의 죄를 대신 담당하고 죽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병자를 치료하시고 귀신을 쫓아내셨습니다. 이분이 나를 통해 그와 같은 큰 역사를 나타내겠다고 하시니 얼마나 영광입니까. 그런데 왜 무조건 나는 할 수 없다고 외면합니까. 나는 할 수 없다고 고집 부려서 주님의 능력이 나에게서 중단되게 해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우리는 원래 할 수 없지만 주님이 말씀하신 대로 순종할 때 이적이 나타납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나 자신을 믿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믿고 성령이 쓰시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왜 믿지 않아서 내게서 능력이 중단되게 만듭니까.


사해를 죽은 바다라고 합니다. 헬몬산에서 엄청난 물이 쏟아져 갈릴리로 들어가고, 갈릴리에서 넘친 물은 요단강으로 흘러 들어갑니다. 그런데 요단강 물이 사해로 가면 그 물은 더는 흐르지 않고 그대로 고여 있습니다. 흘려보내지 않으니 거기서 그대로 갇혀 죽은 바다가 된 것입니다.


여러분, 주님의 복음이 전해지고 전해져 제자들에게, 초대교인들에게, 중세 사람들에게, 그리고 오늘날 우리에게까지 이르렀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후손에게 복음을 물려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지금의 기독교는 예수를 그저 박애주의 사상가 정도로 취급하며 이 땅에서 복 받고 호강시켜 주는 존재로 변질시켰습니다. 누가 변질시켰습니까? 지혜 있는 사람들, 지식 있는 사람들이 마치 예수가 인간 육신의 행복을 주러 오신 것처럼 착각하게 만들어 놓았습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고 했는데 이런 변질된 복음을 들은 사람들의 영혼의 때가 얼마나 불행하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죄로 말미암아 멸망할 죄인을 위해 십자가에 달려 피 흘려 죽으셔서 우리의 죄를 해결하시고 구원하셨습니다. 이 귀한 복음이 결코 나에게서 중단되어서는 안 됩니다. 성령의 사람들을 통해 이 복음을 우리에게까지 운반해 주었으니 우리도 성령으로 후손에게 이 복음을 계속 전해 주어야 합니다. 주님 말씀에 순종하여 복음을 전할 때 나를 통해 이적과 표적은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내 지식 버리고 주께서 명령하신대로
세상은 예수의 제자들을 무시했습니다. 예수께서도 갈릴리 사람이니 제자들과 똑같은 취급을 받으셨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능력과 이적을 나타내시니 범상치 않습니다. 귀신이 떠나가고 질병이 치료받고 죽은 자가 살아나는 이적이 나타납니다. 말만 하면 그대로 이루어지니 정말로 선지자나 메시아겠구나 생각하다가도 그의 제자들을 보면 아무래도 아닌 것 같습니다.


주님께서는 왜 세상에서 미련한 사람들을 제자로 부르셨을까요? 예수의 복음은 예수의 복음을 제쳐 놓을 만한 지식이나 부 그리고 권력이 충만한 사람을 통해 증거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의 복음만이 전부인 사람들을 통해 증거되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할 수 없는 어마어마한 일을 할 수 있도록 주님은 자신을 내어 주셨습니다.


마태복음 10장 5~15절에 예수께서 제자 열둘을 내어보내시며 명령하십니다.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 차라리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 가면서 전파하여 말하되 천국이 가까왔다 하고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문둥이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내되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저 같았으면 “예수님, 우리는 갈릴리 출신 어부요, 저들이 저주하는 세리인데 우리 신분을 다 아는 저들에게 가서 예수님을 전하라니요. 병든 자 고치려다가 안 나으면 맞아 죽습니다”라고 여쭤봤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주님의 요구를 거절할 지식조차 없이 그저 주님이 하신 말씀만 들고 갔습니다.


또 주님은 “너희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이나 가지지 말고 여행을 위하여 주머니나 두 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 이는 일군이 저 먹을 것 받는 것이 마땅함이니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중동 지역의 사막 같은 곳은 먹을 것을 챙겨 가지 않으면 가다가 굶어 죽을 수 있고, 40도가 넘는 곳이니 정신없이 땀을 흘릴 텐데 두 벌 옷도 챙기지 말라는 말씀에 제자들은 묻지도 않고 주님 말씀에 순종합니다.


이렇게 주님의 보내심을 받는 자들은 주님의 명령 외에는 다른 생각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너무나 다른 생각이 많습니다. 사회적, 경제적, 환경적, 현실적 상황 등 모든 것이 갖춰져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코로나19가 유행하기 전, 교회에서 성도들이 전도하러 나갈 때 전도용품을 준비하는 모습을 봤습니다. ‘전도용품은 바로 내 안에 계신 예수다. 내가 가서 병든 자 고치고, 귀신 쫓아내고, 천국 복음을 성령으로 증거해서 그들이 회개하고 치료받고 돌아오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예수를 가져가야 하는데, 분주하게 전도용품만 가져가려고 하니 안타까웠습니다.


전도자가 반드시 가져가야 할 것은 천국 복음을 전파하라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주님이 내게 주님 자신을 주시고, 권세를 주시고, 생명을 주시고, 주님의 피를 주시고, 주님이 내 안에 말씀으로 와 계시니 오히려 주님이 나를 전도용품으로 쓰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주님이 내게 주신 능력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아니, 그 능력은 쓰지 못하는 것이라고 단정해 버립니다. ‘나는 길에 나가서 전도지 주고 ‘예수 믿으세요’라고 말할 수는 있어. 그러나 병은 못 고쳐. 귀신은 못 쫓아. 회개는 못 시켜’라고 한다면 주님이 나를 바라보실 때 얼마나 답답하시겠습니까.


제자들에게 하신 명령만 봐도, 주님의 명령은 이성적으로는 전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문벌 있거나 지혜 있는 사람은 수용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주님 말씀을 듣고 그대로 수용할 수밖에 없을 만큼 세상에서는 무식하고, 성령으로는 예수를 아는 일에 지식이 충만하기를 축복합니다. 그래야 나를 통해 주님의 사역이 이루어집니다. “일군이 저 먹을 것 받는 것이 마땅함이니라”는 말은 병든 자 고쳐 주고, 귀신 쫓아 주고, 나병환자 깨끗하게 해 주면 고침받은 사람들이 옷도 주고 밥도 주고 전도하러 갈 여비도 주지 않겠느냐는 말입니다. 챙기지 않아도 주님의 능력 속에 다 들어 있으니 걱정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령께 이끌려 능력 있게 사용되길
주께서 맡기신 사역은 세상의 누구도 보여 줄 수 없는 이적을 현장에서 나타내는 것입니다. 주님의 이적은 주님의 명령을 받아들인 자에게서 나타납니다. 예루살렘에 각국 사람들이 모였을 때 제자들이 하는 설교를 그들이 다 알아들었습니다. 제자들이 복음을 증거할 때 삼천 명, 오천 명씩 회개하고 돌아왔습니다. 주님의 큰 일꾼이 되려면 주님이 큰일을 명령하실 때 받아들이고 수행해야만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는 죄와 사망과 지옥 형벌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흘리신 피로 구원받았습니다. 구원받은 우리의 가장 큰 사역은 이 구원의 소식을 모든 족속에게 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만약 이 구원의 소식을 전하면서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는 능력을 나타낸다면 사람들은 오히려 우리를 이상하게 볼 것입니다. 주님이 쓰셔서 나타나는 이적이지만 그것을 막기 위해 반드시 핍박이 있다고 주님이 미리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누가 핍박하지 않는데도 전도하지 않습니다. 마귀가 우리 생각 속에서 ‘너는 못 해, 네가 무슨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냐? 전도용품이나 가져가서 ‘교회 한번 와 보세요’ 이 정도만 하면 되지, 네가 무슨 회개를 시키느냐. 넌 거기까지만 하면 돼’라고 속삭입니다. 그 이상의 것을 보지 못하게 마귀 사단 귀신 역사가 영적으로 어둡게 만들고 주의 일을 가로막는 것입니다. 우리는 마귀에게 당하지 말고 주의 일에 제한 없이 쓰임받아 주님의 명령을 이루어 가야 합니다.


주님께서 지혜 없는 사람을 통해 지혜 있는 사람을 부끄럽게 하시고, 능치 못한 사람을 통해 능한 사람을 부끄럽게 하시고, 문벌 없는 사람을 택해 문벌 있는 사람들을 부끄럽게 만드시는 것은, 주님이 그 이상의 절대적인 지식, 절대적인 능력, 절대적인 문벌을 가지셨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할 수 없는 그 이상의 이적을 주님이 나를 통해 나타내실 때 그들이 “어찌할꼬” 하면서 무릎을 꿇고 주님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것은, 주님이 내게 주신 권세와 능력과 이적과 복음 사역의 역사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사랑하는 예수가족이여, 제자들처럼 나도 성령께 이끌려 그렇게 능한 자로, 권세 있는 자로 사용당하기 위해 계속 기도하십시오. 귀신 들린 자에게 귀신이 떠나가야 그에게 복음이요, 병든 자가 치료받아야 그에게 복음이요, 죄인이 회개하고 돌아와서 예수 믿어야 복음입니다. 주님의 이 복음 사역이 나를 통해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증거되어서 한 사람도 지옥 가지 않기를, 저주 속에 병들어 죽지 않기를, 악한 마귀 사단에게 이끌려 저주와 멸망으로 끌려가지 않기를 예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위 글은 교회신문 <688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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