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말씀] 제삼 일에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등록날짜 [ 2021-03-22 13:49:55 ]

누가복음 24장 1~12절

"안식 후 첫날 새벽에 이 여자들이 그 예비한 향품을 가지고 무덤에 가서 돌이 무덤에서 굴려 옮기운 것을 보고 들어가니 주 예수의 시체가 뵈지 아니하더라 이를 인하여 근심할 때에 문득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사람이 곁에 섰는지라 여자들이 두려워 얼굴을 땅에 대니 두 사람이 이르되 어찌하여 산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르시기를 인자가 죄인의 손에 넘기워 십자가에 못 박히고 제삼일에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셨느니라 한대 저희가 예수의 말씀을 기억하고 무덤에서 돌아가 이 모든 것을 열한 사도와 모든 다른 이에게 고하니 (이 여자들은 막달라 마리아와 요안나와 야고보의 모친 마리아라 또 저희와 함께한 다른 여자들도 이것을 사도들에게 고하니라) 사도들은 저희 말이 허탄한 듯이 뵈어 믿지 아니하나 베드로는 일어나 무덤에 달려가서 구푸려 들여다보니 세마포만 보이는지라 그 된 일을 기이히 여기며 집으로 돌아가니라"


부활하신 생명의 주님은 지금도
살아 계셔서 우리 안에 와 계셔
주님 몸된 교회가 예수 생애 재현해
예수 생명으로 구원받기를 바라셔


예수께서는 3년여 동안 제자들을 데리고 다니시며 자신에 대해 열심히 가르치셨습니다. 자신이 왜 이 땅에 왔는지 알려 주셨고, 자신은 결국 죽음을 선택할 것이며, 죽은 후에 부활할 것을 그들에게 여러 차례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마치 기억상실증에 걸린 것처럼 그 말씀을 기억하지 못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를 따르는 목적이 따로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로마로부터 이스라엘의 국권을 회복시키고 세계를 지배하는 왕이 되실 때에 한자리하려는 것이었기에 그 고정관념 때문에 예수께서 고난을 받고 죽을 것이라는 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았던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이 눈물로 은혜받고 기도하며 변화된 것 같아도, 각자 자신이 아는 예수를 고집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본문에, 죽은 예수께 향유를 발라 시체가 썩지 않게 하려고 여자들이 무덤으로 갑니다. 그런데 예수는 무덤에 계시지 않고, 천사가 ‘예수께서 다시 살아나셨다’고 말합니다. 여자들이 제자들에게 가서 예수님이 부활하셨다고 말하지만 믿지 않습니다. 베드로가 이를 확인하러 무덤으로 달려갑니다. 베드로는 예수가 무덤에 계시지 않은 것을 보고 기이히 여기며 집으로 돌아갑니다. 기이히 여겼다는 말은 예수께서 죽은 지 삼 일 만에 부활할 것이라고 하신 말씀을 믿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께서 자신을 가르치신 대로 배우고 믿고 신앙생활 해서 영적으로 절대 실패자가 되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의 죽음으로 영생 얻은 인류
하나님은 영원한 생명을 가지셨기에 영원히 살아 계십니다. 하나님 자신이 영원한 생명이시기에 늙지도 않고,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십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영원한 생명을 우리 인간에게 주셔서 죄로 말미암아 영원히 멸망할 인간의 영혼을 구원하시려고 자기 독생자를 보내시되 생명의 말씀이 육신이 되게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장 14절에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고 했습니다. 그 위대한 영광이 주님의 영광이지만 나의 영광이 되게 하시려고 충만한 것이며, 은혜와 진리도 바로 나에게 주시려고 충만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께서 육신을 입으신 목적은, 십자가에서 찢으신 살과 흘리신 피의 생명으로 죄 아래서 영원히 멸망할 인류에게 다시 살아야 할 생명을 주기 위해서입니다. 예수께서 주신 영원한 생명을 얻은 자라면 이 세상에 부러울 것이 없습니다. 돈이나 권력이나 지식이나 세상 어느 것으로도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없으니,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짐으로 말미암아 영원히 산다고 할 때 얼마나 흥분되며 감사한 일입니까.


요한복음 6장 53~54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예수 믿는 목적은 육의 것을 얻으려는 것이 아닙니다. 영원히 사는 생명을 얻으려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죄 아래서 이미 영혼이 죽어서 태어났으나 예수의 생명으로 영혼이 다시 사는 위대한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또 예수께서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자신의 살과 피를 주어 우리가 그것을 먹고 마심으로 말미암아 참된 생명을 얻었으니 이는 참으로 어마어마한 사건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위대한 생명을 소유한 우리는 항상 기뻐하고 감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이 생명을 빼앗으려는 악한 마귀 사단 귀신의 역사가 있으니 우리는 이 악한 영의 역사를 이기기 위해 항상 기도하고 성령 충만하여 이 생명을 끝까지 지켜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 것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인하여 살리라 이것은 하늘로서 내려온 떡이니 너희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그것과 같지 아니하여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요6:57~58).


예수께서 하나님 아버지가 공급하신 생명으로 사셨듯이, 예수로 사는 자도 예수가 공급하시는 생명으로 영원히 살게 됩니다. 우리가 나이를 먹을수록 더 큰 희망과 소망을 갖게 되는 것은, 육신이 끝나는 순간에 우리 속에 있는 예수의 생명으로 영생을 맛볼 것이기 때문입니다. 영생이 시작되는 순간부터 고통도 아픔도 눈물도 사망도 없이 그리스도와 더불어 영원히 사는 영광이 시작되니 가슴 벅차지 않습니까?


십자가 고통을 자원하신 예수 그리스도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이유는, 죄 아래서 멸망하는 인간에게 자기 안에 있는 영원한 생명을 무제한으로 주어서 살리기 위해서입니다. 죄로 인해 당해야 하는 참혹한 지옥 형벌을, 예수가 대신 짊어지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셔서 예수의 살과 피를 인류가 먹고 마시게 함으로 영원한 양식과 생명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죄 있다 하여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으나 그의 죽으심으로 인류의 죄는 영원히 해결되었고,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 안에 있는 생명으로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자원하셔서 우리에게 아들 예수의 생명을 주겠다고 약속하셨으며 아들 예수께서도 인류 구원을 위해 자원하신 사역입니다. ‘십자가’ 처형은 그 시대 최고의 행악자가 죽는 형벌이기에 이 지구상의 어떤 악한 죄라도 다 짊어지고 죽으셨다는 증거입니다.


세상의 어떤 아버지가 자기 아들을 죽는 일에 내어놓고, 세상의 어떤 자식이 아버지의 명령에 따라 온갖 고통을 당하다가 죽는 것을 사랑이라고 말하겠습니까. 이것은 오직 하나님과 그 아들 예수의 인간을 향한 사랑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아들을 죽는 일에 내어놓는 아픔과 아들 예수가 죽는 아픔이 결국 우리 인류의 죄를 사하시고, 마침내 예수가 다시 사셔서 우리에게 새 생명을 주신 것이 바로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 인간을 향한 그 아들의 사랑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라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요10:17~18).


예수께서 스스로 목숨을 버렸다고 했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군병들이 예수를 잡아가려고 하자 베드로가 칼을 빼 듭니다. 베드로는 ‘우리 선생님은 죽은 자를 살리고 귀신을 쫓아내고 물 위를 걸어가는 전능자이신데 누가 감히 잡아가겠느냐’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포승에 묶여 묵묵히 끌려가십니다. 그리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십니다. “네 검을 도로 집에 꽂으라 검을 가지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하느니라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영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리요”(마26:52~54). 예수께서 자원하셨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주님을 위해 무엇을 자원해서 하고 있습니까. 하나님 앞에 철든 사람은 자신이 받은 은혜의 분량을 깨달아 충성도, 전도도, 순종도 자원해서 합니다. 철이 없으니까 인격적인 신앙 양심의 행위가 나타나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영생과 천국을 주시지 않았다면 우리는 영원한 멸망과 파멸과 지옥의 절망적인 고통에서 영원히 참혹한 형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잔인하게 찔리고 상하고 징계받고 저주받고 채찍에 맞고 마침내 십자가에서 갈기갈기 찢긴 채로 물과 피를 다 쏟으시기까지 우리의 죄와 허물과 징계와 저주와 지옥 갈 절망적인 사망을 담당하셨으니 이 얼마나 감사하며 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입니까. 우리는 지구상에 어떤 것으로도 갚을 수 없는 크나큰 은혜를 입었으니 주님 앞에 자원해서 충성할 만큼 철든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예수로만 가질 수 있는 영원한 생명
과연 우리 안에는 주가 주신 생명이 있습니까? 그가 나를 위해 죽으심으로 내 죽음을 해결하시고 나에게 생명을 주셔서 그 생명으로 살게 하셨는데 그 사실을 내 것으로 확실하게 소유하지 않으면 그저 하나의 종교생활로 전락하고 마는 것입니다. 내일을 알지 못하는 암흑 속에서 만약 신이 있다면 도와 달라는 식으로 예수를 믿는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시편 90편 9~10절에 “우리의 모든 날이 주의 분노 중에 지나가며 우리의 평생이 일식간에 다하였나이다 우리의 년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년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라고 했고, 창세기 3장 19절에는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이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히브리서 9장 27절에는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죽은 후에 심판을 받고 죄로 말미암아 영원한 지옥 형벌에 처하게 된다면 그 비참함을 어찌하겠습니까. 그래서 예수께서 우리 죄를 대신 짊어지고 그 고통 속에서 매를 맞고 저주를 받고 살이 찢기고 결국 십자가에 달려 피 흘려 죽기까지 하여 우리의 심판을 해결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음으로 영생을 얻고 심판이 끝났으니 어찌 감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게 살아 역사하고 계십니다(히13:8). 지금도, 장차도 영원토록 우리 안에 살아 계시니 우리는 예수 때문에 영원히 살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는 생명 주시는 예수의 일터
예수 그리스도는 구원의 복음을 증거 하시려고 성령으로 자신의 몸 된 교회를 세우게 하셨습니다. 성령으로 내 안에 주님 모신 성전이 됐습니다. 아무 가치 없는 내 속에 오셔서 더러운 죄를 끄집어내서 피 흘려 죽어 해결하시고 피로 거룩하게 하십니다. 성령이 오셔서 내 안에 계셔서 나를 통해 예수님 마음을 드러내고 표현하고 생애를 재연하는 생명의 산실이 바로 교회입니다. 고린도전서 3장 16절에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라고 하셨습니다.


또 고린도전서 6장 19~20절에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하셨습니다. 최고의 영광은 죄를 해결하고 이기고, 마귀 사단 귀신을 이기고, 육신의 정욕과 세상을 이기는 것이요, 죽어가는 영혼을 살리는 것입니다. 주님이 피 흘려 구원하신 은혜를 지켜 승리하는 것이요, 진리의 말씀에 순종해서 구원의 은혜에 감사하며 사는 것입니다.


교회는 주님이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일터입니다. 죄 아래서 죽어 멸망하는 영혼을 찾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 사랑의 양심이 파도치는 현장입니다. 설교할 때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총에 대해서 단 한 번도 빠지지 않고 말하는 것은 이 세상 무슨 소리보다 우리 영혼에게는 예수가 주신 생명이 제일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는 우리 육신을 위해 피 흘린 것이 아니라, 우리 영혼을 살리려고 피 흘리셨으니 교회는 반드시 영혼에게 생명의 양식을 주는 축제의 현장이 되어야 합니다.


예배당은 이천년 전 십자가에 달려 죽은 예수를 기념하는 기념관이 아닙니다. 예배당에서 드리는 예배는 죽은 자를 기리는 ‘죽은 자를 위한 제사’도 아닙니다. 교회는 주님이 살아계신 일터요, 역사하시는 현장입니다. 우리가 예배하는 성전은 죄로 죽어 지옥 갈 영혼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다시 살아나는 곳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의 생명의 잔치가 넘쳐나는, 대연을 베푸는 축제의 자리입니다. 죄 아래서 영원히 죽어 멸망할 자가 영원히 살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소유하는 터전입니다.


예수가 계시지 않은 곳에는 생명이 다시 사는 위대한 역사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반드시 설교에는 ‘예수’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삶도 예수가 운영하고, 그의 말씀이 운영하고, 성령이 운영해야 합니다. 평생에 예수가 운영자 되고, 예수가 양식이 되고, 예수가 생명이 되어야 합니다.


구원받은 자는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해야
여러분은 내 영의 희망찬 예배, 희망찬 생명의 말씀, 없어서는 안 될 하나님과의 만남을 얼마나 깊이 경험하고 사십니까? 그 크신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셔서 날 위해 그토록 잔인하게 십자가에 달려 죽어서 내 죄를 담당하신 은혜에 대한 감사와 그 은혜의 분량을 모르는 예배는 하나님께서 받으실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4장 23~24절에 “하나님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찌니라”고 했습니다.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라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은혜의 분량을 가지고 신앙 양심을 발산시키면서 하나님을 뜨겁게 감동시키는 예배를 드리라는 말입니다. 교회는 하나님과 우리의 만남, 은혜 베푸신 이와 은혜받은 자의 만남, 은혜받은 자가 은혜 베푸신 이에게 감사하고 은혜 베푸신 이가 끊임없이 은혜를 주시는 곳입니다.


우리가 왜 예배를 드립니까?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영원한 생명을 얻었기에 감사해서 예배합니다. 또 생명을 얻되 풍성히 얻으려고 예배합니다(요10:10).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생명을 얻었으니 예배를 통해서 그 생명을 더 풍성하게 얻으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죽은 자들과 함께 무덤에 계시지 않으십니다. 지금도 강단에서 목회자를 통해 주님의 살아 계심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는 우리 죄를 해결하시고 생명으로 부활하셔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고 교회를 세우셔서 그 생명을 우리에게 계속 공급해 주고 계십니다. 할렐루야!


내 안에서 일하시는 예수로 자유하라
세상에서 제일 불행한 사람은 감사가 없는 사람입니다. 감사하는 사람은 항상 기쁘고 소망이 넘칩니다. 영혼의 때에 누릴 영생과 천국에 대한 꿈에 부풉니다. 신랑 되신 주님의 재림을 기다립니다. 그런데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자식 때문에, 배우자 때문에, 하는 일이 안 된다며 고작 육신의 것 때문에 영적인 것이 무너지고 감사를 잊어버린다면 얼마나 안타깝습니까. 구원의 은혜에 감사하며 사는 것이 나 자신을 행복하게 만드는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구원받은 자들을 통해 수많은 영혼을 살리시려고 내 안에 와 계십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분, 전능하신 분이 내 영혼 하나 살리기 위해 십자가에 자신을 못 박아 죽이는 일에 내어놓고, 자기 살을 찢고 피를 흘려 내 영혼의 양식이 되게 하시고, 나를 그토록 사랑하셔서 자기 생명을 가지고 내 안에 성령으로 와 계시니 참으로 어마어마한 사건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나를 위해 살 찢으신 주님, 피 쏟으신 주님, 날 사랑하신 주님, 나를 죄와 사망과 지옥에서 구원하신 주님이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은 엄청난 영광입니다.


제자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죽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무덤을 찾아갔지만 주님은 부활하셔서 제자들을 만나 주셨습니다. 주님은 지금도 살아 계셔서 지금 우리 안에 와 계십니다. 주님은 지금도 살아 계셔서 주님의 몸 된 교회를 통해서 병자를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고, 천국 복음을 전하며 주님이 왜 죽으시고 왜 부활하셨는지를 말씀하고 계십니다. “내가 너희 죗값을 짊어지고 죽었으니 이 사실을 믿으면 네 죄는 무효가 된다, 회개하고 죄 사함받고 성령 받고 천국에서 나와 함께 영원히 살자. 예수 피의 공로로 죄를 회개하는 순간에 나는 네 안에 성령으로, 말씀으로, 예수 피의 생명으로, 예수 이름으로 임할 거야!”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주님을 부인할 수 없을 만큼 내 안에 반드시 성령으로, 경험으로 와 계시다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예수가족이여,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능력으로, 생명의 이름으로 영육 간의 죄로 오는 모든 고통을 해결합시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마귀 사단 귀신, 사망의 세력을 몰아내 버리고 예수가 계신 증거로 자유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태복음 11장 5절에는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고 하셨습니다.


예전에 우리는 예수를 볼 수 없는 소경 된 자요, 하나님 말씀대로 살 수 없는 앉은뱅이 같은 자요, 도무지 고칠 수 없는 나병환자와 같이 깊이 병든 자요, 예수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는 귀머거리요, 죄 아래 죽어서 지옥 갈 자요, 영생과 천국이 없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영적으로 우리를 보게 하시고, 듣게 하시고, 영육 간에 겪을 고통을 해결하시고, 천국 복음이 내게 충만케 하시고, 가난했으나 예수 생명으로 영원히 사는 영생의 부유와 하나님 나라의 부유를 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예수가족이여, 주가 주신 생명으로 저 천국에서 영원히 행복하게 삽시다. 육신이 썩어 없어지는 그 날, 주님이 강림하는 그 날에 한 사람도 낙오자 없이 천국에서 만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위 글은 교회신문 <691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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