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대적 영적 생활1·44] 죄를 합리화하지 마라

등록날짜 [ 2019-05-07 15:32:57 ]



하나님 앞에선 핑계할 수 없다
어느 날인가 아침 일찍 일어나 기도하려고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런데 얼마쯤 있다가 눈을 떠 보니 제가 옆으로 누워서 자고 있었습니다. 기도하다가 순간 잠이 든 것입니다. 분명히 기도하고 있는 줄 알았는데 옆으로 넘어져 자고 있었으니, 그 순간만큼은 속은 것입니다. 그런 제 자신을 보면서 ‘이놈아, 너 왜 이렇게 속았니?’ 하며 얼마나 분하고 억울해했는지 모릅니다.

그런 상황에서 ‘그래, 내가 지금 피곤할 만하지. 내 체력은 여기까지인가 보다’ 하며 얼마든지 핑계를 댈 수 있습니다. 과학적으로 보나, 의학적으로 보나, 체력이 한계에 다다랐다고 별별 이유를 다 내세워서 나 자신을 위로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기도하지 못한 것을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측면에서 위로받고 싶지 않습니다. 나 자신이 잘못한 것을 다른 논리로 위로받으려 하지 말고, 잘해 놓고 하나님께 위로받고 싶기 때문입니다.

성도에게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라고 당부하면 “목사님, 제가 사정이 있어서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럴듯한 핑계를 대거나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어서 목사가 더는 말하지 못하도록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 앞에 가서는 아무리 합리적이고 타당하고 논리적인 이유를 내세운다 해도 변명이 통하지 않습니다. 지금은 구실을 대면 주위 사람들도 고개를 끄덕일 수 있지만 그가 하나님 앞에 갔을 때, 하나님께서도 “그랬구나” 하시며 그를 인정해 주실 리는 만무합니다.

어떤 사람이 세상을 떠나 하나님 앞에서 예수 믿지 않은 것을 심판받을 때 “저는 예수 믿을 기회가 없었습니다. 우리 집안은 할아버지 때부터 대대로 무당, 불교 를 믿었습니다. 그래서 예수 믿으라는 소리를 들어 보지도 못했습니다. 저는 예수 믿는 것이 무엇인지 전혀 몰랐습니다. 몰라서 그런 것인데 어떻게 합니까? 하나님도 제 사정 이해하시지요?”라고 한다고 합시다. 그렇다고 이 사람이 지옥에 가지 않고, 천국에 갈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 앞에서는 핑계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롬1:20). 나의 똑똑함으로 합리적인 조건을 내세워서 신앙생활 못 하는 것을 합리화하지 말아야 합니다. 타당한 논리를 내세워서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빠져나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자기 죄 두둔하려는 못된 근성 고쳐야
만약에 어떤 사람이 아무도 모르게 부정한 일을 저지르고 모든 사람을 감쪽같이 속였다고 합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보고 계십니다. 죄를 범한 것도 모자라서 그 죄를 덮어 숨기려 했으니 죄만 더 커질 뿐입니다. 이 땅에서 불의와 잘못이 발견되지 않았다고 해서 그 죄가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죽은 뒤, 하늘나라에서 심판받게 될 때가 옵니다. 감추어 둔 죄를 스스로 쏟아 놓게 될 그날, 부정은 기어이 드러나고야 맙니다.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후5:10). 죄는 숨기거나 두둔할 것이 아닙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면서 죄를 덮거나 핑계 대며 빠져나가면 마귀가 제일 좋아합니다. 마귀는 우리 인간이 죄를 끄집어내고 죄에서 빠져나가는 것을 제일 싫어하기 때문에 자꾸 죄를 두둔하게 합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가 기도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지만 못할 수밖에 없다며 타당한 논리를 내세워 어떻게든 변명하려고 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충성할 수 있는데도 일할 만한 여건이 안 된다며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칩니다. 어떤 사람은 의사도 못 고치는 중병이 들어서 반드시 죽는다는 논리만 믿고 있다가 끝내 치료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만나 보지 못한 채 생을 마감합니다.

어떤 사람은 열심히 일하면 하나님께서 잘되고 형통하게 해 주실 텐데 스스로 게으르고 나태해서 가난이라는 고통을 당합니다. 왜 일하지 않느냐고 물어보면 일거리가 없고 이러저러한 이유로 일을 못하고 있다고 타당한 논리를 내세웁니다. 전도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왜 전도하지 않느냐고 물어보면 저마다 타당한 논리와 이유가 있습니다. 이처럼 마귀역사는 타당한 논리를 내세워 인간을 끝없이 미혹합니다.
이것이 지금 당장에는 나도 이해하고 남도 이해시켜서 그냥 넘어갈 수 있지만, 하나님 앞에 가서 “너는 마귀의 궤계에 졌다”며 질책받는다면 그때는 변명할 기회가 없습니다.

타당한 논리와 이유를 들어서 합리화하는 버릇은 마귀에게서 나왔습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고 죄를 범하자 하나님께서 “아담아, 왜 선악과를 먹었느냐”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아담은 “당신이 만들어 준 여자가 먹으라고 해서 먹었는데요”라면서 타당한 논리를 내세웁니다.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여자를 안 만들어 주었다면 선악과를 먹을 이유가 없었다는 투로 말합니다. 원인을 제공한 분이 하나님이니 하나님께도 책임이 있다는 말입니다. 이 논리에 뭐라고 답변하겠습니까? 이렇게 논리를 내세우면서 자기 타락을 위로받으려고 하는 못된 근성을 버려야 영적 생활에 성공할 수 있습니다.
<계속>


위 글은 교회신문 <623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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