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례교 믿음의 사람들 <25> 김주언 안수집사

등록날짜 [ 2010-05-10 13:52:06 ]

부모에게는 효도, 이웃에게는 구제의 삶 살아
신앙인의 본분 지키며 손 대접 잘하기로 소문

김주언 안수집사는 1907년 경상북도 문경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서도와 음악에 뛰어난 재능을 발휘하여 인근에서 유명한 예능인으로 소문난 김주언 안수집사는 효성이 지극하여 효자상을 수차례 받기도 했다. 그리스도인으로서도 손 대접을 잘하기로 소문이 났으며 교단 사역에서도 많은 공적을 남겼다.

효자상 수차례 받으며 선한 영향 끼쳐
일제 말엽 신사참배 반대로 본 교단 교역자들이 모두 검거당한 32인 중 1인으로 함흥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른 김주언 안수집사는 1907년 12월 9일 경북 문경군 호서남면 점촌리에서 김창원 씨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고향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김주언은 마을에 있는 서당에 나가 한문을 공부했다. 천자문을 배우고 명심보감을 배우면서 김주언은 붓글씨에 유달리 재능을 보였다. 그의 붓글씨는 인근 고을까지 널리 알려져 지방의 명필로 유명했다고 한다. 부유한 가정에서 자라면서 바이올린을 배웠고 성악에도 소질을 보였다.

김주언은 부모를 잘 섬기는 효자였다. 아버지는 몸이 불편하여 병마와 싸우는 삶을 살았다. 그래서 아버지와 같이 다닐 때는 의자를 들고 다니면서 아버지가 힘이 들면 앉아 쉴 수 있도록 배려를 했다.

뿐만 아니라 무엇이든지 아버지가 먹고 싶어 하는 음식이 있으면 어떻게 하든지 드실 수 있도록 마련했다고 한다. 한번은 아버지께서 물고기를 먹고 싶어 하셔서 아버지를 혼자 집에 계시게 할 수 없어 등에 업고 냇가로 나가 물고기를 낚았다. 김주언은 아버지가 살아 계실 동안 그 곁을 떠나지 않고 그림자처럼 다니면서 효도를 했다고 한다. 그래서 고향에서 주는 효자상을 수차례 받았다.

아버지는 정미소를 운영했다. 정미소를 운영하면서 아버지는 어려운 이웃을 보면 서슴없이 쌀을 나누어 주었다. 당시는 보릿고개를 지나면서 마을에서 굶주리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그의 아버지는 어려운 이웃을 보면 한 번도 그냥 지나치지 않고 먹을 것을 나누어 주곤 했다.

이러한 환경에서 자란 김주언은 언제나 어려운 이웃을 돌보고 구제하는 일에 열심이었다. 그의 집은 노인들을 잘 대접하여 노인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마을에 아기를 낳는 가정에는 쌀과 미역을 풍성하게 사 들고 가서 새로운 생명의 탄생을 즐거워했다고 한다.

정미소에서 나오는 왕겨를 무료로 가져갈 수 있도록 배려하기도 했는데 인근 마을에서 이 정미소의 도움을 받지 아니한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였다. 이같이 평소에 신앙인의 본분을 잘 지켜 어려운 이웃들과 함께하는 실천적인 신앙인으로서의 본을 보였다.

신사참배 거부로 옥고 치러
1942년 9월 6일 전국 침례교단의 교역자들이 신사참배를 반대하면서 일제에 의해 구속될 때 김주언 안수집사도 검거되어 원산 경찰서 유치장에 갇혔다. 이곳에서 혹독한 고문을 받았으며 1943년 5월1일 함흥 형무소로 이감되었다. 함흥 재판소에서 재판을 받았고 1944년 5월 10일 교단 해체령이 내리면서 5일 후에 이상필 안수집사와 함께 옥에서 풀려났다.

용모단정하며 교회 건축에도 탁월
김주언 안수집사는 용모가 단정하였다. 언제 어디서나 가지런한 몸가짐과 자세가 품위를 돋보이게 했다. 이러한 한결같은 인격을 가지고 있어 많은 사람이 그를 좋아하고 따랐다.

김주언 안수집사는 미적 감각이 탁월했다. 특히 건축 부분에 관심이 많았는데, 새로운 건물을 발견하면 즉시 도면을 그리고 집을 개조할 때 응용했다. 그래서 그는 그의 집을 편리하고 살기에 아주 이상적인 환경으로 꾸미곤 했다.

점촌에서 처음으로 건평 200평의 교회를 건축할 때 혼자 설계하고 직접 작업을 지휘해서 교회를 지었다. 이후에도 수시로 교회를 개조해서 아름다운 교회를 만들어 교인들을 즐겁게 했다. 아직도 김주언 안수집사가 세운 교회가 그대로 전해 오는데 현재 건축하는 교회 건물들과 비교해 보아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바른 판단 온화한 성품으로 교단 운영에 헌신
그는 1946년부터 1964년까지 총회의 재무부장으로 18년간 봉사하였다. 비록 집사의 지위에 있었지만 총회 임원회에서 모든 사안을 날카롭게 지적하여 바른 판단을 유도하는 지혜로운 사람이었다. 또한 그의 성품은 교단을 운영하는 모든 사람과 화합하여 밝은 마음으로 교단 일을 해냈다.

김주언 안수집사는 손님을 잘 대접했다. 집에 찾아오는 손님을 정성껏 대접했다. 조금도 소홀함이 없는 대접을 받게 된 손님들은 늘 감사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돌아가곤 했다고 한다.

김 안수집사는 1982년 11월 20일 75세의 일기로 부인과 슬하에 4남 1녀와 손자와 손녀를 남겨놓고 하나님 품에 안겨 고이 잠들었다.

자료출처 『한국 침례교 인물사』

위 글은 교회신문 <192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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