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례교 믿음의 사람들 <31>] 이대복(Daniel B. Ray) 선교사

등록날짜 [ 2010-08-02 22:42:11 ]

할아버지부터 아들까지 4대째 한국에서 사역
전쟁 중에서도 흩어진 침례교회 돌보며 구호

이대복 선교사는 1923년 12월 25일 중국 광시성 오주에서 렉스 레이(Rax Ray) 선교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1950년 28세 되던 해에 텍사스 본헤임 침례교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1953년 사우스 웨스턴 침례신학교를 졸업했고 그해 이혜란(Frances Ray)과 결혼해서 가정을 꾸렸다. 같은 해 10월 한국 선교사로 파송을 받았고 한국에 내한했다.

이대복 선교사의 할아버지 필립 길만 선교사는 중국에서 1886년부터 1918년까지 32년간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다가 중국에서 생애를 마쳤다. 지금도 중국 해남에 그의 무덤이 있다. 이대복 선교사 아버지는 할아버지의 대를 이어 중국에서 1920년부터 1950년까지 선교사로 일하다가 1950년 중국이 공산화되자 한국으로 피신하여 5년간 선교활동을 하다가 미국으로 돌아가 그곳에서 하나님의 품에 안겨 텍사스에 묻혔다.

1953년 한국 선교사로 파송 받아 한국에 들어온 이대복 선교사는 34년 동안 한국에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고 은퇴하여 미국으로 돌아갔다. 그의 장남 미가(Mark) 목사도 선교사로 소명을 받고 선교지에서 헌신했다. 그래서 이대복 선교사 가계는 4대째 해외 선교사로 사역한 보기 드문 가족이다.

한국에 들어온 이대복 선교사는 1954년 침례신학대학교에서 영어 교수로 일했다. 이후 1955년 전도부장, 1968년 지방협동 선교사 겸 선교부 재단 부장, 1971년에는 침례신학대학장 서리로 취임했으며 1979년부터 1986년까지 협동학장을 지냈다. 1985년부터 1987년까지 2년간 그가 창설한 군인전도부에서 부장을 역임했다.

이대복 선교사는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당하는 사람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장학회를 조직하여 어려운 학생들이 계속 공부하도록 하였으며 돈이 없어 병원에 가지 못하는 병자들을 입원하게 했다. 개척교회들도 잘 살펴 도움을 주었다. 이대복 선교사는 자신에게 도움을 원하는 모든 사람에게 친절하게 대했으며 최선을 다해 그들과 고통을 함께했다. 개척교회들도 잘 살펴 도움을 주었다. 전쟁으로 폐허가 되어 헐벗고 굶주린 사람들이 많이 있던 시기에 이대복 선교사는 한국에서 사역했다. 이대복 선교사는 “나는 중국 사람도 미국 사람도 한국 사람도 똑같이 사랑하고 싶어요”라고 말하면서 34년 동안 인생의 황금 같은 시기를 자기가 사랑하는 한국 땅에서 열정적으로 복음을 전했고 전쟁의 폐허 속에서 소망을 잃고 방황하는 우리 민족과 눈물을 같이 흘리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이대복 선교사가 한국 선교사로 재직 중 가장 힘들었던 때는 한국 침례회가 둘로 나누어지려고 할 때였다고 회고했다. 미국에서 안식년을 지내고 있을 때 이 소식을 들었는데 그는 크게 걱정하여 날마다 기도했다고 한다. 얼마 되지 않아 갈라졌던 총회가 다시 하나로 합쳐지자 생애에서 가장 기쁜 때라고 밝게 웃었다고 한다.

이대복 선교사는 미국 남침례교 한국 선교회에서 보낸 두 번째 선교사였다. 그의 아버지는 1951년부터 1956년까지 부산에서 6.25 전쟁 직후 폐허가 된 이 나라에서 지방협동 선교사로 사역했다. 세계 적십자사를 통해 들어오는 구호물자들을 차에 싣고 전국 각지에 흩어진 침례교회를 찾아다니며 헐벗고 굶주린 사람들을 구호하는 데 진력했다.

이대복 선교사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 사역한 선교사 중 한 사람이었다. 또 키와 몸집이 큰 거구인 만큼 마음도 크고 넓었다. 타고난 성품이 온화하고 덕과 정감이 있는 친절한 사람이었다.

그는 말하였다. “나는 이 땅에 묻히고 싶다. 내가 가장 고생한 곳도 이곳 한국 땅이요, 가장 많이 밟은 곳도 이곳 한국 땅이다. 그래서 나는 이 땅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에게 가장 많은 정을 주었고 또한 많은 정을 받으며 살아왔다. 희로애락을 이 땅 위에서 누리고 살아왔기에 잠든 후에도 이 땅 위에 묻히는 것이 당연한 나의 소망이다”라고 심정을 토로했다.

어려움에 부닥쳤던 한국 교역자들과 폭넓게 사귀면서 이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또한 여러 기관에서 일하면서 감사패와 공로패 그리고 표창장도 많이 받았다. 34년 동안 그가 일한 사역을 좁은 지면에 다 기록하기에는 불가능하다.

한평생을 이 땅에서 우리와 함께 살면서 주님의 복음을 증거한 이대복 선교사는 이 땅이 가장 어려웠던 시절 주님의 교회를 위하여 헌신했던 선교사이며 우리의 벗이었다.

이처럼 충성스럽게 사역하는 이대복 선교사와 하나님이 늘 함께하셨고 위로하셨다. 하나님은 이대복 선교사에게 자녀 5남매를 선물로 주었다. 대한민국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자기 몸보다 더 사랑한 그는 충성스런 하나님의 일꾼으로 하나님 나라에 그 이름이 기록되어 있을 것이다. 

자료출처 『한국 침례교 인물사』

위 글은 교회신문 <203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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