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콤 펜윅 한국 교회 전도기 ①]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저 너머의 나라

등록날짜 [ 2010-11-08 21:44:26 ]

다섯 살 때 아버지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성장
가정에서 보고 배운 신앙이 결국 선교사로 이끌어

말콤 펜윅은 1889년 한국에 도착했다. 그는 신학 교육을 받은 적이 없지만, 캐나다에서 철물 사업자로서 그리고 평신도 전도자로서 쌓은 경험을 사역에 십분 사용하였다. 한국이 어디 붙은 나라인지도 모르던 그는 1889년 7월에 하나님이 자신을 그 곳의 선교사로 부르신다는 느낌을 받았다. 처음에는 거부했으나, 결국에는 “적어도 찌그러지고 누추한 양철통 정도는 되어 생명수를 전달할 수 있겠다”고 결심했다. 그로부터 넉 달 뒤 한국에 도착했다. 한반도 남부와 북부에서 동시에 사역한 펜윅이 세운 교회들은 한국인들의 수고에 힘입어 급성장한 결과 250개로 증가하는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이들은 선교 열정에 달아올라 만주와 시베리아 한인 사회에까지 가서 교회를 세웠다. 1936년 펜윅이 죽자 그 교회들은 1950년까지 외국 선교사의 감독을 받지 않은 채 유지했다.

이번 호부터 펜윅 선교사가 직접 쓴 글을 토대로 한국으로 오기까지 과정과 한국에서 활동했던 사역을 정리해보았다. <편집자>

목자가 길 잃은 자기 양을 찾은 경위
하나님은 증인들을 필요로 하신다. 두렵게도 지구의 거민들 가운데 10억 인구가 아직 그리스도를 영접하거나 배척할 기회조차 가져본 적이 없다. 이교도로 태어나는 아이들이 ‘거듭난’ 자녀들보다 200배나 더 많다. 더 두려운 것은 교회가 1900년간 노력을 기울였는데도 하나님을 증거할 충분한 수의 증인들, 길 잃은 영혼에게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인정하게 함으로써 하나님이 과연 옳으셨음을 입증할 증인들을 지속적으로 유지하는 데 실패했다는 것이다. 게다가 교회는 한국처럼 복을 풍성히 받은 나라에조차 증인을 한 명도 보내지 못하고 있다.

이 글을 쓰게 된 것을 굳이 변명하자면 이런 이유 때문이다. 글을 잘 쓰려고 해 봐야 결함투성이가 될 것을 잘 알기에 다른 사람과는 좀 다른 방식으로 쓴다. 그러나 내 관심은 글을 쓰는 데 있지 않다. 변변찮은 이 사람에게 하나님이 넘치도록 베푸신 은혜를, 우리 주님이 여전히 다니시면서 기회가 있을 때마다 그 못 자국 난 손을 내밀며 가리키시는 저 너머에 있는 교회들에게 알려야 한다는 일념만 있을 뿐이다. 사람들은 “어설픈 일꾼이 연장을 탓한다”고 말한다. 이 말이 사실이라면 우리가 보고 겪어서 잘 아는 대로 예수님은 노련한 일꾼이다. 그분은 사역을 하는 데 사용하지 않을 수 없었던 도구들을 한 번도 탓하지 않으셨다. 이 책이 나처럼 불완전한 증인이나, 한국인 전도자들처럼, 무학(無學)한 도구들을 주께서 기꺼이 쓰신다는 사실을 교회들이 믿도록 용기를 준다면, 이 글은 제 소임을 다하는 셈이다.

하나님이 나를 불러 맡기신 사역은 교파를 초월한 것이다. 한국 방방곡곡에서 영혼들이 주께 나오고 그들을 돌볼 감로들을 세우지 않을 수 없게 되었을 때, 우리는 교단 명칭을 될 수 있는 대로 간단하게 붙였다. ‘대한기독교회’(기독교한국침례회의 초창기 명칭)인데, ‘한국에 세워진 그리스도의 교회’라는 뜻이다.

엄격한 집안의 규율
우리 조부모가 스코틀랜드 퍼스셔 피트케른을 떠나 당시 요크라고 하던 캐나다 토론토 땅을 밟으셨을 때, 토론토에는 ‘허드슨 만’이란 간판이 붙은 상점 한 곳, 제분소 한 곳, 철공소 한 곳, 그리고 술집 몇 곳이 전부였다.

아버지는 내가 불과 다섯 살 때 돌아가셔서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거의 나지 않는다. 그러나 아버지를 칭송하는 이웃들과 아버지의 친구분들을 만나면 언제나 즐거웠다. 선교사가 된 뒤 마을 교회에서 처음 설교했을 때, 스코틀랜드에서 오신 인자한 노부인이 다가와서 “당신이 아치 펜윅의 아들이우?” 하고 물었다. 그렇다고 말하니 “아이구 그렇군. 아버지처럼 좋은 사람일 게야. 틀림없어”라고 했다. 사업에 성공하여 크게 유명해진 신사 한 분도 다가와서는, “난 당신 아버지를 존경하던 청년들 가운데 하나였지요. 아버지는 나나 다른 청년을 만나면 언제나 불러 세우고서 친절하게 이것저것을 물으시고 훌륭한 조언을 한 마디씩 해주셨지요” 하고 말했다. 아버지는 마을에 일이 있으면 언제나 앞장서셨다. 가정의 규율은 아주 엄하고 혹독했지만, 우리는 한결같이 아버지께 고마운 마음을 갖고 있다. 어머니는 내가 집을 떠나 하나님을 찾고 찾으려 할 때, “아들아, 네가 예수님께 마음을 드린다면 너를 아무리 멀리 보내도 상관하지 않는다” 하시며 눈물로 간곡히 당부하시는 모습이 생각난다. 나는 그 말씀에 복받치는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기차를 타고 길을 떠나면서, 예수님을 알 때까지 찾고 또 찾으리라는 결심을 했다. 이후 내 나이 25세 때 비로소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깨닫게 되면서 한국 선교사로서의 삶을 다짐하게 되었다. <계속>
『한국에 뿌려진 복음의 씨앗(말콤 펜윅 저)』에서 발췌

위 글은 교회신문 <216호> 기사입니다.

    아이디 로그인

    아이디 회원가입을 하시겠습니까?
    회원가입 바로가기

    아이디/비번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