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남 이승만, 그의 생애와 업적(15)] 기독교 교육 전파 사역에 열중

등록날짜 [ 2013-05-08 11:58:02 ]

미국에서 박사 학위 받은 후 귀국… 일제의 탄압 시작


<사진 설명> 1910년 성탄절에 서울 YMCA 성경연구반 소속 학생들 앞에 서 있는 이승만.
프린스턴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막 귀국한 이승만은 청년들의 롤모델이었다.
이승만의 영향을 받아 임병직을 비롯한 많은 엘리트 청년들이 미국으로 유학을 갔다.

미국 프린스턴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이승만이 그저 편안하게 살기를 원했다면, 미국에서 괜찮은 대학교수로 여생을 마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승만은 하루라도 빨리 한국에 돌아가고 싶어 했다. 비록 조국은 국권을 상실하여 꿈꾸던 모습은 가슴속에만 남아 있었지만, 조국을 위해 할 일이 있었다. 서정주는 조선에 돌아와 첫 겨울을 맞은 이승만을 시인다운 필치로 묘사했다.

“이 질식한 합병 초의 고국에 돌아와서 아직도 집집이 통곡이 끊이지 않는 장안이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올라가서, 몇몇 어린아이들로 더불어 한겨울의 하늘을 쳐다보며 연만 날리고 지냈다 하여도 우리는 그것을 이해할 수 있다. 이 민족의 통곡을 능히 대표할 감정과 의리를 가진 사람이면, 그 통곡의 때에 연 같은 걸 날리고 있던 심정도 알 수가 있단 말이다. 그렇다. 그는 1910년 합병되던 해의 한겨울을 날마다 남산 마루턱에 올라, 종이 연을 하늘에 띄워 놓고는, 자새에 감긴 실을 풀었다 감았다 하며, 수두룩이 짓밟히고 있는 조국의 혼을 모조리 그이 속에 불러들이기에 여념이 없었던 것이다.”

서정주가 이승만의 전기 집필을 위임받아 오랜 시간 대화를 나누었던 사실을 참조한다면, 그해 겨울 이승만이 연날리기에 몰두했던 것은 사실인 듯하다. 하늘에 연을 띄워 놓고 바라보는 장면을 연상해 보면, 반만년 독립국이 사라져 버린 허망함을 달래는 행위로 적절해 보인다.

귀국한 이승만은 YMCA를 활동 무대로 삼았다. 감옥에 투옥된 시절 이후 기독교 입국론과 교육을 외쳐 왔던 이승만에게 참으로 어울리는 사역이었다. 이승만은 YMCA에서 한국인이 맡을 수 있는 최고위직인 총무로 취임했다.

이승만은 YMCA에서 우리 민족 역사에 특별히 기록될 만한 활동을 벌였다. 이승만은 교회에서 설교하고 성경 공부를 인도하며 백만인 영혼 구원 활동에도 참여했다. 전국에 YMCA를 조직하는 한편, 성경과 국제법을 강의하고 여러 책을 번역하려고 시도했다. 이승만은 기독교 교육 사역에 몰두했다.

이 무렵 이승만이 길러 낸 인물들은 혁혁한 이름을 자랑한다. 훗날 외무부장관이 된 임병직, 공화당 의장 정구영, 과도 정부 수반 허정, 대한상공회의소 회장 이원순 등이다. 당시 기독교 활동은 위험했다. 조선총독부는 기독교인이라면 일단 의심의 눈초리로 보았다. 기독교인은 거의 민족주의자들이었고 기독교를 통해서 독립을 추구했기 때문에 일제는 말도 안 되는 이유로 기독교를 탄압했다.

한 기독교 간행물은 한국인에게 내면의 마귀를 축출하라고 외쳤다. 이에 검열관은 “여기서 말한 마귀는 일본을 지칭하는 것이 틀림없다. 당신들은 일본에 대항하도록 조선인을 부추기고 있다”라고 지적했다. 곧 모든 기독교 간행물에 ‘마귀’라는 표현을 쓸 수 없다는 지시가 내려졌다.

또 다른 기독교 잡지는 봄에 싹트는 새 생명을 찬양하는 글을 실었다. 총독부는 그것에도 시비를 걸었다. 새 생명이란 말은 조선의 기독교인이 궐기해서 새 정부를 세우도록 선동한 글이라는 이유였다.

이승만은 미국에서 일본을 비판한 숱한 강연과 인터뷰 기록을 남겼다. 그러니 일본이 항상 주시하며 감시하는 인물인 것은 당연했다. 따라서 이승만은 집필과 강연에서 일제의 비위를 거스르는 어떤 빌미도 주지 않고자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였다.

이승만은 일제를 조심하고 주의하면서도 기독교를 전하는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1911년 여름, 이승만이 전국에서 활약한 YMCA 선교 활동은 예수의 제자들이 복음을 들고 떠난 전도여행을 연상케 한다. 이승만은 기차, 배, 말이나 나귀, 우마차, 가마, 인력거를 타고 모두 3700킬로미터를 여행했다.

선교 구역 13곳을 방문하고 집회도 33회나 열었으며, 학생 7535명을 만났다. 남으로 광주, 전주, 군산까지 내려갔고 북으로는 평양, 선천까지 올라갔다. 이런 맹활약으로 지방 학교에서도 기독교 모임이 만들어져 YMCA는 전국적인 조직으로 성장했다.

이승만을 비롯한 기독교인의 활발한 움직임은 조선총독부를 자극했다. 이에 일제는 조선 기독교 지도자들을 일망타진하고자 105인 사건이라는 음모를 꾸몄다. 유영익은 이승만이 지나치게 열심히 전국적인 조직을 만든 것이 105인 사건의 단서가 되었다고 지적한다.

일제가 뒤집어씌운 죄목은 어마어마했다. 1911년 11월 11일, 기독교인들이 데라우치 총독 암살을 시도했다고 하여 무려 700여 명을 검거했다. 그중에서 123명이 기소됐는데, 투옥된 동안 이들은 엄청난 고문을 받았다. 고문을 받다가 사망한 이가 3명, 정신 이상을 일으킨 이가 4명이었으니, 그 고문이 얼마나 잔인했는지 추측할 수 있다. 최종 유죄 판결을 받고 구속된 이가 105명이었다. <계속>

위 글은 교회신문 <336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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