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남 이승만, 그의 생애와 업적(21)] 외롭고 험난한 여정을 걷다

등록날짜 [ 2013-06-18 09:56:07 ]

무장 투쟁으로는 일본을 꺾을 수 없다고 판단


<사진 설명> 이승만이 임시대통령으로서 상해에 머물렀던 크로포트 선교사 부부(왼쪽 남녀)의 집 앞에서(1921년).

이승만이 독립운동 노선으로 외교를 선택한 이유는 두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는 무장 투쟁론의 한계 때문이었다. 1920년대에 이미 일본은 세계 3대 군사 강국이었다. 전성기에 700만 명에 이르는 강력한 군대를 거느린 일본을 약소국이 무력으로 물리친다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했다. 설령 독립군이 일본군에게 타격을 입힌다고 해도, 우리 민족이 받아야 할 보복은 참혹했다.

일제는 1919년 3·1운동 이후 고조했던 국내외 항일 운동 세력에게 잔인하게 보복했다. 1920년 노령 연해주에서 4월 참변이 일어났다. 일제는 독립운동을 억누르려고 한인에게 대대적인 체포, 방화, 학살을 저질렀다. 우리 겨레 300여 명이 죽고 100여 명이 체포당했다.

뒤이어 간도 사변이 일어났다. 독립군의 근거지였던 간도 한인 사회에 무차별 공격을 했다. 3469명이 피살하고 170명이 체포됐으며, 여인 71명이 강간당했다. 민가 3209호, 학교 36곳, 교회 36곳이 불타버렸다.

이처럼 우리가 일본군을 공격하면 일본군은 엄청난 보복을 동포들에게 퍼부어댔다. 무력으로 일본을 이길 수가 없고, 일본군을 공격한 대가로 치러야 하는 우리 민족의 희생이 너무 컸기에, 이승만은 외교 노선을 주장했다.

둘째는 국제 정세를 읽는 이승만의 안목 때문이었다. 이승만은 일찍부터 일본과 미국의 충돌을 예상했다. 아시아 각국을 침략한 일본은 구미 열강, 특히 태평양을 사이에 두고 위치한 미국과 필연적으로 대결하게 되리라 판단했다. 그 때가 도래하면 한국은 미국의 지원을 받아 무력 투쟁도 가능하리라고 보았다.

따라서 이승만에게 친미 외교 노선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독립운동의 유일한 길이자 마지막 보루였다. 임시 대통령이면서도 임시 정부 소재지인 상하이가 아니라 워싱턴에서 활동하기를 고집했던 이유도 이러한 신념 때문이었다.

이승만의 이 같은 외교 노선에 이동휘는 즉각 반발했다. 이승만과 정반대 노선을 견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동휘는 연해주 한인 사회당 세력과 연결된 인물이었다. 상하이에서도 독립운동가들에게 공산주의를 선전하고 보급했다. 이동휘는 만주와 연해주 지역 독립군을 중심으로 한 무장투쟁론을 주장했다.

이동휘는 이념에서나 독립운동 방법론에서나 정반대인 이승만을 향해서 “사회주의적 소양이 부족하다. 대가리가 썩었다”라는 원색적인 비난을 퍼부었다. 하지만 이동휘식 무장투쟁론은 뜻은 장하지만, 현실적으로 무모하다는 비판이 임시 정부 내에서도 제기되었다.

상하이 임시 정부에서는 그 후로도 독립운동 노선을 둘러싼 갈등이 적지 않았다. 그러나 국내 민족주의자들은 친미 외교 노선을 폭넓게 지지했다.

이상재와 안재홍이 1925년 3월 비밀리에 결성한 흥업구락부는 서울에서 학계, 언론계, 실업계, 관계, 그 밖의 전문직에 종사하는 유명 인사들을 포섭했다. 그들은 이승만과 마찬가지로 한국 독립은 궁극적으로 미국의 후원에 달려 있다고 보았다.

외교 노선을 둘러싼 갈등은 이승만과 이동휘의 대립에서 볼 수 있듯이, 이데올로기를 배경으로 했다. 확고한 반공주의자 이승만과 공산주의자 이동휘의 대립으로도 읽히기 때문이다. 오늘날에도 외교 노선을 걸었던 이승만을 비판하고 이른바 ‘무장 투쟁’을 한 김일성을 높게 평가하는 흐름이 있다.

이승만이 총 들고 피 흘리며 싸우는 무장 투쟁이 아니라 외교로 독립운동을 했다는 점을 놓고 편한 길로 갔다고 간주하는 이들이 있다. 주체성 없이 강대국에 의존하려는 것으로 치부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승만의 외교 노선은 참으로 힘겹고 험난한 여정이었다.

나라도 없는데 외교를 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과업인가. 더군다나 일본과 오랜 기간 우호 관계를 지속했던 미국을 움직여 일본을 물리친다는 것이 얼마나 불가능해 보이는 일인가.

세상에 어느 나라가 멸망 위기에 놓인 약소국을 위해서 다른 강대국과 싸워 주겠는가. 그 일이 성사되게 만들고 또 성사되기까지 기다린다는 것은 또 얼마나 허망하며 고통스러운 세월인가.

결국에는 이승만이 옳았다. 사실관계를 확인하면, 광복이 이루어진 것은 우리가 총 들고 싸워서 일본을 물리친 것이 아니고, 미국이 원자폭탄까지 사용해 가면서 일본을 굴복시켰다. 그 시간이 오기까지 이승만은 숱한 모멸과 무시와 비판을 견뎌내야 했다. <계속>

위 글은 교회신문 <342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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