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남 이승만, 그의 생애와 업적(34)] 미국에서 펼친 특급 외교

등록날짜 [ 2013-10-01 10:13:32 ]

단독 정부 수립 위해 언론 매체 등 적극 이용


<사진설명> 한국의 독립정부 수립을 촉구하기 위해 미국에 갔던 이승만 박사가 돌아오는 길에 중국에 들러 이청천 장군(가운데 꽃다발 든 이)과 함께 귀국했다(1947.4.21).

1946년 6월 3일은 운명적인 날이었다. 1945년 9월 이승만은 미국 시러큐스대학 교수인 올리버에게 “귀하가 대학을 그만두고 우리의 홍보 업무에 전적으로 매달릴 것”을 요청한 바 있다. 올리버는 미국 연설학회장을 지냈으며 훗날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즉석 연설을 준비해 줄 정도로 유능한 인물이었다.

미국에서도 성공적인 이력을 쌓아가던 인물이 이승만과 맺은 인연 때문에 개인적인 희생을 감수하고 한국으로 왔다. 올리버는 1942년에 이승만을 만난 이후 줄곧 한국 독립을 돕고 있었다.

올리버가 서울에 도착한 날은 공교롭게도 1946년 6월 3일이었다. 그날 정읍에서는 이승만이 단독 정부 수립이라는 폭탄선언을 던졌고, 서울에서는 미 군정 최고 지도자들과 올리버가 만났다. 다음은 올리버가 회고한 내용이다.

“하지 장군과 그의 차석으로 남조선 군정 장관으로 근무하던 아처 러시 장군의 모임에 불려 나갔다. 두 사람은 나와 이야기를 나누려고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나를 만나고 싶어 했던 것 같다. 그들은 모두 이승만이 과대망상으로 거의 제정신이 아니라고 말했다. 사실상 하지 장군은 어떤 정신병 의사에게 이 박사와 다소 은밀하게 면담하도록 일을 진행한 바도 있다. 그들은 이승만이 개인적으로 이야기를 나눌 때에는 매우 유쾌하고 좋은 사람이지만, 공식 모임에서는 아주 난폭한 사람이 되어 소련과 한국의 공산주의자들을 비난함으로써 자기들의 일 처리를 더욱더 어렵게 만들고 있다고 말했다.”

이승만이 정읍에서 단독 정부를 수립해야 한다고 주장한 6월 3일에, 하지 장군은 서울에서 정신병자 이승만은 어떤 자리도 차지할 수 없다고 극언했다. 두 사람의 정면충돌을 상징적으로 보여 준 날이다.

하지 장군과 러시 장군이 올리버를 만난 이유는 미국인 입장에서 도움을 받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승만의 오랜 동지인 올리버가 이승만을 설득하여 공산주의자들과 친하게 지내려는 미국의 정책에 방해되지 않게 하려는 의도도 분명 있었을 터이다.

그러나 올리버는 그의 평생을 통해서 웬만한 한국인보다도 더 한국을 사랑하는 사실을 입증해 보였다. 올리버는 하지 장군의 희망과는 달리, 오히려 이승만과 한국의 처지에서 미국을 비난하는 작업을 계속했다. 결국 하지 장군은 “올리버를 처형해야 한다”는 극단적인 발언까지 했다. 이처럼 대한민국 건국 과정에는 올리버와 같은 고마운 미국인들이 있었다.

미국에 도착한 이승만은 왕성한 활동력을 발휘했다. 하지 장군의 정책을 비판하고 한국의 독립을 요구했다. 이승만은 언론과 미국 정치계, 특히 한국 문제를 취급하는 국무부를 대상으로 집요하고도 열정적인 설득 작업에 나섰다. 국무부에 제출한 건의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우리의 독립 요망은 즉시 성취되어야 하며 만약 그렇지 않으면 전쟁이 일어날 것이다. 한국인의 인내는 최후 단계에 달하고 있으며 한국인의 정당한 요구는 즉시 허용되어야 한다. 즉 자유롭고 민주주의적인 한국의 탄생이야말로 극동의 평화를 의미하는 일이다. 그렇지 않을 경우, 전 세계에서 회피하고자 하는 새로운 전쟁이 야기될 것이다.”

미국은 이미 한국을 잊고 있었다. 하지만 이승만의 특급 외교는 한국에서는 잊혔지만 미국인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데는 성공했다.

이승만을 통해서 <뉴욕타임스> 등 주요 언론매체들은 “한국은 내란의 위기 직전에 있다” “북괴군 50만이 남침을 준비 중이다” “하지는 한국을 소련에 팔아넘기려고 한다” “미국은 즉시 독립을 주든지 아니면 소련과 함께 물러가라” “30일 내지 60일 이내에 남한에 군정을 인계할 과도 독립 정부가 수립돼야 한다”는 등 흥미진진한 기사를 보도하였다.

독립 운동가 시절, 국무부는 이승만에게 적대적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들도 이승만을 한국 국민의 지도자로 대했다. 국무부 피점령국 담당 차관보 존 힐드링 장군은 맥아더와 절친했으며, 평소 이승만을 존경하고 있었다. 이승만과 힐드링의 회담은 우호적인 분위기에서 진행되었다.

그때 또 한 번 세계 정세의 타이밍이 이승만과 절묘하게 맞아떨어졌다. 오랫동안 소련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며 공산주의에 협력적인 태도를 보이던 미국의 정책이 하루아침에 뒤바뀐 것이다. 발단은 그리스와 터키였다. 소련의 지원을 받은 공산 세력은 그리스의 합법적인 정부를 무너뜨리려고 했다. 소련은 터키에 해군 기지를 설치하여 서방 국가들을 위협하려고 시도하고 있었다.  <계속>

자료제공 | 『하나님의 기적, 대한민국 건국』(이호 목사 저)

위 글은 교회신문 <355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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