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남 이승만, 그의 생애와 업적(35)] 남한 단독 자유선거 가능케 해

등록날짜 [ 2013-10-10 11:57:51 ]

미국으로 하여금 공산당 배제토록 정책 이끌어


<사진설명> 1947년 3월 12일, 미 상-하 양원 합동회의 석상에서 추후 ‘트루먼 독트린’으로 명명되는 역사적인 연설을 하는 트루먼 미국 대통령. 

미국 대통령 트루먼은 소련의 팽창주의에 맞서기보다 근본적인 정책을 세우기로 마음먹었다. 새 정책은 불과 2년 전만 해도 동맹국이던 소련을 주적(主敵)으로 설정하는 전략상 변화를 가져왔다.

‘트루먼 독트린’으로 역사에 남은 연설은 1947년 3월 12일 상하원 합동회의에서 18분 동안 이어졌다. 연설에서 트루먼은 공산주의와 대결을 선언했다. 그동안 소련과 벌인 협력은 어설프고 성과 없이 이용만 당했다. 트루먼은 협력을 포기하고 정면 대결로 나간다며 방향 전환을 알렸다. <뉴스위크>는 이 역사적인 연설을 이렇게 논평했다.

“만약 말이 국가 간 미래를 결정한다면 이 연설이 그런 경우에 해당한다.”

논평은 미래를 정확히 예측했다. 트루먼이 연설한 이후로 인류 역사가 다시 써졌다. 미주리 주 농촌 출신으로 순박하고 솔직하며 용감한 품성을 지닌 트루먼은 자신이 연설한 대로 신속하게 움직였다. 북대서양 조약기구(NATO)를 창설하여 서유럽과 미국의 집단 안보를 강화하고, 마셜 플랜(Marshall Plan)으로 유럽의 전후 복구를 도왔다.

트루먼 독트린은 적과 동지를 뒤집어 놓는 결과를 초래했다. 2차 대전 당시 동료이던 소련을 적군으로 놓았고 적이던 독일과 일본을 아군으로 삼았다. 미국은 독일과 일본을 민주화하고 경제를 부흥하게 하여 두 나라가 서방 세계 편에 서게 유도했다.

트루먼 독트린이 1947년 벌어진 일이니 1917년 공산 혁명 이후 30년 만이다. 미국이 소련의 실체를 직면하고 대결을 선언하기까지 30년이 걸렸다. 이와 대조적으로 이승만은 1917년 무렵에 이미 반공을 확고하게 선언했다. 이승만이 미국보다 30년을 앞서 갔다. 이후 30년을 기다리느라고 말할 수 없는 고생을 했다.

늦은 감이 있지만, 트루먼 독트린은 대한민국 국운에 큰 영향을 끼쳤다. 미국은 한반도에서 이루어지지 않을 좌우합작이나 소련과 합의해야 하는 정책을 점차 포기했다. 따라서 이승만의 입지가 탄탄해졌다. 좌우합작에 반대하고 소련의 위협에 대항하는 단독정부 수립을 추진했기 때문이다. 이승만은 트루먼 독트린이라는 세계사의 대세를 타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여기서 역사적 아이러니가 발생했다. 트루먼 독트린은 뜻밖에도 남한에 주둔하던 미군을 철수하게 했다. 유럽에 들어가는 경비가 큰 폭으로 증가했기 때문이다. 미국은 나라가 극도로 빈곤할 때 공산당이 자리할 기반을 만든다고 판단했다. 따라서 마셜 플랜이라는 원조 계획을 세우고 모든 재력을 유럽에 쏟아부었다.

이에 일본을 제외한 동아시아 지역에서는 경비를 삭감해야 했다. 결과적으로 미국은 한국에 주둔한 미군이 ‘체면을 손상하지 않으면서 철군할 방안’을 1947년 가을부터 모색했다.

미국은 자국의 명예를 지키는 동시에 한반도에서 손을 떼는 방법을 유엔에서 찾았다. 미국은 소련과 합의가 더는 불가능하다고 판단해 한국 문제를 유엔에 상정했다. 1947년 11월 14일, 유엔 총회는 43대 0으로 독립 정부 수립을 위해 한반도에서 유엔 감시하에 자유선거 실시를 결의했다.

결국, 1947년 이승만이 미국을 방문한 이후 한반도에서 자유선거를 실시하고 독립 정부를 수립한다는 유엔의 결의로 끝났다. 이로써 한반도에 대한 강대국들의 신탁 통치는 무효가 됐다.

이승만을 만난 힐드링은 국무부 피점령 국가 담당 차관보에서 은퇴한 뒤인 1949년 1월 6일 이 문제에 관하여 중요한 증언을 남겼다.

“미국은 소련 비위를 건드릴까 두려워 신탁 통치 협정이 잘못되었다는 점을 공개적으로 선언하지 못했다. 이승만, 올리버, 임병직은 끈질기고 참을성 있게 미국 관리나 언론인들을 한 사람씩 차례로 설득했다. 그들은 한국 문제를 정직하게 처리하려 했다. 이는 위대한 운동 중 하나인 십자군 운동이다. 치를 떨던 반대자들 주장을 뒤집어엎은 기억이 지금도 나를 즐겁게 한다. 이승만과 그의 참모들은 미국이 강대국 소련을 다루는 편법적인 방법을 버리고 약소국 한국에 정당하고 의로운 태도를 취하게 했다. 이승만 박사는 그 일을 해냈고 미국을 자기편으로 만들었다.”

1947년, 바야흐로 한반도는 대전환의 해를 맞이하고 있었다. <계속>

자료제공 | 『하나님의 기적, 대한민국 건국』(이호 목사 저)

위 글은 교회신문 <356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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