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남 이승만, 그의 생애와 업적(56)] 선거 반대 시위가 전국적으로 확산

등록날짜 [ 2014-03-17 14:32:32 ]

자유당 부정부패 타도에서 결국 대통령 책임론까지 번져


<사진설명> “국민이 원한다면 물러나겠다”는 하야성명을 발표한 이승만 대통령이 경무대를 떠나 거처인 이화장으로 가고 있다(1960년 4월 26일).

이승만을 이을 후계자로 이기붕이 지목되었다. 이기붕은 무엇보다도 이승만에게 절대복종하는 스타일이었다. 무난한 성품이었기에, 미국 정부도 선호했다. 후계자를 결정하자 이승만을 둘러싼 인의 장막은 더욱 두꺼워졌다.

1960년 대통령과 부통령을 선출하는 선거가 열렸다. 자유당에서는 이승만과 이기붕, 민주당에서는 조병옥과 장면이 출마했다. 대선을 지배한 관심은 ‘누가 대통령에 뽑히는가’ 보다 ‘누가 부통령에 뽑히는가’였다. 이유는 두 가지였다.

첫째, 여러 가지 실정에도 여전히 국부로서 카리스마를 지닌 이승만을 이기기는 그 누구도 어려웠기 때문이다.

둘째, 이승만이 85세 고령이라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랐기 때문이다. 헌법은 대통령 유고시 부통령이 대통령을 승계하라고 규정하므로, 부통령직을 둘러싼 대결이 치열했다. 이는 민주당 후보 선출 과정에서도 분명히 드러난다. 조병옥과 장면은 서로 부통령 후보에 출마하고자 했다. 결국 장면이 부통령, 조병옥이 대통령에 출마했다.

하지만 선거 한 달을 앞두고 미국에서 치료를 받던 조병옥이 사망한다. 이로써 이승만이 재집권한다는 사실은 확정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부통령 선거가 중요했는데, 조병옥의 사망으로 선거는 사실상 부통령을 뽑는 선거로 진행되었다.

문제는 자유당에서 부통령 후보로 나선 이기붕의 경쟁력이 약했다는 점이었다. 1956년 선거에서 이승만이 대통령에 뽑혔지만, 부통령으로는 민주당 장면이 뽑혔다. 1960년 선거에서도 장면이 뽑힐 가능성이 높았다. 더군다나 조병옥이 사망하자 대통령 후보를 낼 수 없던 민주당은 부통령 선거에 총력을 기울이는 동시에, 국민에게 부통령만이라도 뽑아 달라고 눈물로 호소했다.

다급해진 자유당 지도부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이기붕의 당선을 위해 다양한 수법을 동원했다. 기권표에 자유당을 기표해서 무더기로 집어넣기, 누구에게 투표했는지를 확인하게 하는 공개투표 강요, 금품 살포를 비롯한 금권 선거, 정부 기관을 다양한 방법으로 동원한 관권 선거를 자행했다.

심지어 모든 경찰관에게 미리 사표를 받는 악랄한 방법도 썼다. 선거에서 여당을 찍은 표가 확실하게 나오지 않으면, 경찰관들을 해고하겠다는 협박이었다.

1960년 열린 국무회의는 ‘부정 선거 내각’의 면모를 보여준다. 이승만 대통령이 참석하지 않은 회의에서 공개적으로 부정 선거 논의를 진행했다. 선거 일주일 전인 3월 8일 국무회의록을 보면, 그들은 마치 승리가 확정된 듯 말했다.

3월 15일 선거 당일, 계획적인 부정이 전국에 걸쳐 일어났다. 오후 3시 부정에 항의한 민주당이 선거 무효를 선언했다. 민주당 마산지부에서 부정 선거를 규탄하는 시위가 최초로 일어났다. 시위대는 경찰과 충돌했다. 그 와중에서 10여 명이 사망하고, 70여 명이 다치는 끔찍한 유혈 사태가 발생했다.

그러나 자유당은 야당이 주장하는 바를 일축했다. 투표 부정에 이어서 개표 부정까지 자행했다. 개표 결과 이승만 92%, 이기붕 78%로 자유당이 압도적으로 승리했다고 발표했다.

이어서 3월 17일 이승만 대통령이 담화를 발표했다. 벌써 백 명에 가까운 사상자가 발생했는데도, 대통령은 상황을 전혀 몰랐다. 이승만은 유혈 사태에 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유당이 선거에 승리한 사실을 격려하고 야당의 주장을 꾸짖었다.

“안될 일을 하다, 실패하고 나서도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마산 사건의 책임을 자유당에 떠넘기는 일은 당치 않으며….”

국민은 귀가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대통령을 둘러싼 인의 장막이 얼마나 견고하고 어처구니없는지를, 또 대통령과 국민 사이에 놓인 괴리가 얼마나 큰지를 확인해 주었다.

마산에서 시작한 시위는 전국으로 번졌다. 이때까지만 해도 시위대는 선거를 다시 하자는 주장을 주로 펼쳤다. 이승만이 하야해야 한다는 목소리는 높지 않았다. 자유당은 강경하게 대처했고 한 달쯤 지나자 시위는 조금씩 수그러드는 모습이었다.

그런데 4월 11일, 뜻밖의 사태가 발생했다. 마산 앞바다에 시신 한 구가 떠올랐다. 부정 선거 반대 시위에 참여했다가 실종된 김주열 학생 시신이었다. 김주열은 고향인 전라북도 남원을 떠나 마산에 공부하러 갔다가 시위에 참여했다. 열일곱 살 꽃다운 나이에 눈에 최루탄이 박힌 참혹한 시신으로 떠올랐다. 잦아들던 시위의 불길은 다시 거세게 타올랐다. <계속>

위 글은 교회신문 <377호> 기사입니다.

    아이디 로그인

    아이디 회원가입을 하시겠습니까?
    회원가입 바로가기

    아이디/비번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