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남 이승만, 그의 생애와 업적(58)] 이승만이 남긴 업적은 대체 불가능해

등록날짜 [ 2014-03-31 11:13:22 ]

임기 말 잘못으로만 건국 대통령을 격하하기는 어려워 


<사진설명> 대통령 직에서 물러나고 경무대에서 이화장으로 돌아온 다음 날 이승만 박사가 이화장 담장 앞에 모인 동네 사람들에게 놀러 오라고 말하고 있다(1960년 4월 27일).

이제까지 4.19를 무엇이라 정의하느냐고 물으면, ‘이승만의 독재와 국민의 저항’이라는 단답식으로 끝냈다. 하지만 50년 세월이 흐른 지금은 차분히 생각해 볼 때다. 4.19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첫째, 4.19는 이승만의 성공과 실패가 함께 작용한 결과다. 4.19를 일으킨 주역은 학생들이었다. 학생 수가 비약적으로 늘어난 이유는 이승만이 추진한 교육 정책이 성공했기 때문이었다. 일제강점기에 어떤 형태로든 교육을 받은 사람은 국민 14%에 불과했다. 이승만이 집권한 이후, 세계 최빈국 수준인 경제 상황에도 매년 정부 예산 10% 이상을 교육에 쏟아 부었다.

그 결과로 취학 연령기 아동 96%가 입학하는 교육 기적을 달성했다. 그렇게 입학한 학생들이 학교에서 민주주의를 배웠다. 교육에 성공해서 학생들이 늘어났고 민주주의를 가르쳤으므로 학생들이 봉기할 수 있었다.

언론 역시 마찬가지다. 이승만 집권 이전에는 언론 산업 활성화 자체가 어려운 시기였다. 일단 글을 읽을 줄 아는 국민이 20% 미만에 불과했다. 글자도 못 읽는 사람들이 신문을 사서 볼 리가 만무했다. 하지만 이승만 집권기에 문자 해독률은 80% 이상으로 치솟았다. 글을 읽을 수 있는 사람들이 늘어나자 언론 역시 활성화할 수 있었다.

정권 말년에는 경향신문을 폐간하기도 했지만, 이승만은 대체로 언론의 자유를 존중했다. 따라서 언론은 자유롭게 정부를 비판했다. 그 당시 구독률이 높던 언론 가운데는 동아일보, 경향신문, 사상계가 있었다. 세 언론 모두 이승만과 대립 구도를 형성하던 반대 세력의 견해를 대표했다.

이처럼 언론의 성장과 자유로운 비판활동이라는 이승만의 업적이 있었기에, 시민의 민주 의식이 향상하고 저항 의식도 자라날 수 있었다.

둘째, 이승만의 하야 결단은 그의 실책에도 높이 평가할 대목이다. 최근 중동 민주화 사태를 보면 이 점이 분명해진다. 수천 명, 수만 명이 죽고 다치는 상황에서도 중동 독재자들은 학살을 저지르고 군대를 동원해 끈질기게 버텼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잘못을 깨달았을 때, 국민이 원한다면 물러난다고 한 이승만의 결단은 희생을 최소화했고 나라를 보존했다.

셋째, 이승만은 민주주의 파괴자라고 비난받는다. 이 경우를 검토해 본다. 1919년 4월, 필라델피아 한인 대표자 회의가 열렸다. 독립투사들과 유학생 100여 명이 모인 이 자리에서 ‘한국인의 목표와 열망’이라는 결의문 5가지를 채택했다. 그 가운데 “정부 수립 후 10년간 중앙 집권식 통치를 할 것”이라는 대목이 있다. 미국식 민주주의를 추구하되, 당장은 어려우므로 10년 정도는 중앙 집권식 통치, 다시 말해서 강제성을 띤 권위주의적 통치가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1920년 서재필 박사가 상해 임시 정부에 보낸 정책 제안서에도 같은 내용이 실렸다.

‘중앙 집권식 통치’가 누차 언급된 사실은 독립 운동가들 사이에서 일종의 합의가 있었다는 사실을 추론하게 한다. 민주주의 전통이 약한 우리나라가 독립한 뒤에 곧바로 미국식 정치를 하기는 어려웠다. 10년 정도는 강력한 중앙 집권 정치로 민주 국가의 기틀을 준비한 뒤에 민주주의로 이행해야 한다는 방침이 독립지사들이 공유한 시각이었다.

이는 중국 혁명의 아버지 손문에게서도 발견되는 견해다. 손문 역시 민주주의를 실현하려고 10년 정도 중간 단계를 계획했다. 따라서 이승만이 아니라 누가 대통령 자리에 올랐어도, 당장 민주주의를 실시하기에는 어려웠다.

6.25 사변 때 전시작전권을 미국에 넘긴 결정 역시 비난을 받는다. 그러나 1941년 10월 9일 중국과 우리 임시정부는 행동 준수 9개 항에 합의했다. 이는 우리 광복군을 중국군 총참모장 휘하에 두기로 한 약속이었다. 우리가 소유한 전시 작전권을 중국에 양도한 결정이었다. 대개 임시정부의 광복군이라고만 알고 있지만, 사실은 중국군 산하 소속이었다.

필자의 소견으로, 이승만이 저지른 과오는 ‘대체가능’이었다. 그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그 자리를 차지했더라도, 저지를 확률이 높았다. 그보다 더한 과오, 예를 들어 한반도 공산화 같은 엄청난 비극 역시 이승만이 아닌 누군가에 의해서 일어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승만이 남긴 업적은 ‘대체불가능’이었다. 그만큼 미국을 알고 공산주의를 알고 백성을 국민으로 전환할 작업을 지휘할 인물이 없었다. 그러므로 대한민국 건국 대통령은 말년에 벌인 과오로만 정의하기에는 매우 큰 족적을 남겼다고 할 수 있다.  <계속>

자료제공 | 『하나님의 기적, 대한민국 건국』(이호 목사 저)

위 글은 교회신문 <379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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