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가산책] 예수님 죽음 슬픔 묘사한 ‘피에타’

등록날짜 [ 2018-11-03 11:55:23 ]

베네치아파 리더 ‘조반니 벨리니’
절제된 표현으로 비통함 보여 줘
 
움브리아파 ‘피에트로 페루지노’
묵상적인 분위기 정교하게 구성


“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그 모친과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섰는지라”(요19:25).
예수님께서 우리를 죄와 지옥에서 구원하시려 십자가에 못 박히는 현장에 요한을 제외한 제자들은 도망가고 없었다. 예수님을 따르는 여인들과 그 모친 마리아가 조용히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지켜봤다. 피에타(Pieta)란 ‘슬픔’ ‘비탄’을 뜻하는 이탈리아 말로, 죽은 예수님을 안고 슬퍼하는 마리아를 표현하는 미술 양식이다. 다양한 작품 가운데서 두 작품을 감상해 보자.


조반니 벨리니 <피에타>
15세기 말 이탈리아 화가 조반니 벨리니(Giovanni Bellini, 1430 추정~1516)가 그린 작품이다. 그는 당시 피렌체 회화와 쌍벽을 이루던 베네치아 회화의 리더였다. 따라서 베네치아 회화의 특징을 살려 명료한 형태감과 빛 가운데 스며 있는 따스하고 화려한 색채를 서로 원숙하게 조화시켜 인간의 정신성과 자연 세계의 아름다움을 탐색했다. 이 그림은 세 인물의 절제된 동작과 간결한 구도에도 주의 깊고 원숙한 채색으로 인물 내면의 깊은 슬픔을 드러낸다. 가시관을 쓴 예수님의 얼굴은 고통을 이겨 낸 듯 고요하다. 힘없이 늘어뜨린 왼팔을 석관 위로 내려놓은 예수님을 마리아와 요한이 부축하고 있다. 머리에 쓴 베일에 얼굴이 그늘진 마리아는 죽은 예수님의 뺨에 자신의 뺨을 맞대며 예수님을 바라본다. 눈언저리가 충혈되고 부풀어 오른 마리아는 예수님의 오른손을 들어 올려 손등의 못 자국을 보여주면서 죄 없이 죽은 예수님의 희생을 상기시킨다. 비탄에 젖은 감정을 자제하는 표정이 역력하다. 오른쪽 요한은 예수님을 부축하면서 슬픔을 이기지 못해 넋이 나간 채 입을 벌리고 목 근육을 세워 예수님의 죽음을 우리를 향해 호소하는 듯하다. 회색빛으로 물드는 하늘 아래 멀리 예루살렘 성이 보인다. 인물들의 머리카락과 수염도 세밀하고, 정면으로 보이는 예수님의 옆구리에 찔린 상처와 두 손등의 못 자국과 팔의 심줄도 선명하다. 멀리 수평선이 보이는 원경의 건물들과 굽이져 흐르는 강물도 섬세하게 묘사했다. 어두워 가는 회색조 하늘에 노을빛이 물드는 순간을 포착하여 색채와 빛을 능숙하게 조화시켜 서정성을 드러내면서 견고한 형태로 화면의 통일성을 부여한다. 무엇보다 품위를 흩트리지 않고 기품 있게 나타낸 인물들의 절제된 감정 표현이 한층 더 깊은 비통함에 젖게 한다.

피에트로 페루지노(반누치) <피에타>
15세기 이탈리아 화가 피에트로 페루지노(Pietro Perugino, 1450 추정~1523)가 그린 작품이다. 페루지노는 초기 르네상스의 대가로 감미롭고 감상적이며 단순화한 인상을 중시하는 움브리아파(派)의 리더였고, 르네상스 거장 라파엘로의 스승이었다. 이 그림은 단순해 보이지만 감동적인 찬사와 경건하고 묵상적인 분위기가 정교하게 구성돼 있다. 전경에 세심하게 배열된 인물들은 모두 우아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 예수님은 해부학적 지식을 바탕으로 고대 그리스 조각상을 참고로 하여 부드럽고 다정한 선으로 형태를 마감해 이상적인 아름다움을 나타낸다. 마리아는 예수님을 자신의 무릎에 누인 뒤 안고 있다. 예수님의 상체는 사도 요한이, 하체는 긴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막달라 마리아가 자신의 무릎으로 받치고 있다. 그들 뒤로 십자가 처형의 순간부터 매장까지 함께한 니고데모와 아리마대 요셉이 서 있다. 인물에서 느껴지는 조각 같은 견고함은 인물들에게 이 그림의 주제에 걸맞은 존재감을 드러낸다. 마리아를 중심으로 인물들을 엄격한 대칭 구도에 맞게 표현하면서도 한 사람은 위를, 한 사람은 아래를 바라보는 식으로 연출해 리듬감을 선사한다. 원경에서 희미하게 빛나는 풍경은 무한함을 암시하며, 영적인 차원을 강조해 준다. 배경은 전체적으로 풍부하게 채색된 색채와 안정된 빛으로 페루지노만의 특유의 조화를 이룬다. 페루지노의 작품 중에 명작에 속하는 작품으로, 당당히 피에타 회화의 전통으로 자리 잡고 있다. 

/ 김찬미 기자

위 글은 교회신문 <597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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