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극 밧줄 관람평] 우리가 처한 영적 현실 시리도록 아름답게 그려 낸 연극

등록날짜 [ 2018-01-04 13:08:28 ]

지난 성탄절 오후 예루살렘성전에서 우리 교회 문화복음선교국에서 하나님께 올려 드린 연극 ‘밧줄’은 박효진 장로의 교화 간증집 『하나님이 고치지 못할 사람은 없다』를 우리 교회 청년들이 여러 차례 각색해 거의 새로운 작품으로 탄생시킨 것이다. 사형수가 교도소에서 전도받아 구원의 은총을 경험한 후 교도소 수감자들을 전도하고, 자기는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지만 그 영혼은 천국에 간다는 감동적인 줄거리다. 前 기독교한국침례회 기획국장이자 목회학 박사인 김병제 목사가 성극을 관람한 소감을 신학적 견지에서 적어 성도들과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사진설명> 사형수 이호성(손창수 분)이 사형대 앞에서 죽음을 앞두고 마지막으로 주님께 감사를 고백하고 관객을 향해 “여러분은 죽을 준비 됐습니까?”라고 묻는 장면. 강문구 기자 

 

 

▧ 눈 앞에서 보여 주는 부활의 현실

주인공의 부활 장면 통해
구체적으로 그려보지 못한 영혼의 때 신령한 부활 두 눈으로 목격하듯 깨달아
지금도 감동과 여운 계속 돼


사람은 앞을 내다볼 수 있다. 내일이 어떻게 펼쳐질지를 파악하고 준비한다. 물론 그렇지 않을 때도 있다. 그런데 사람이 내일, 모레가 아니고, 1년 후, 10년 후도 아니고, 죽음을 넘어서서 또 다른 영원의 세계를 바라고, 영원의 그림을 그리는 일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은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영원이라는 경계선을 넘지 못한다. 그들은 절대로 영원을 알지 못한다. 크리스천의 비전은 영원을 품는다는 점에서 유례가 없을 뿐 아니라, 지독히도 ‘래디컬’(Radical, 근본적)하다. 이 세상에 속한 자들은 지독히도 세상을 전부로 알고, 이 세상에서 출세하는 것을 전부로 안다. 그러나 크리스천은 이 세상 너머로 눈길을 돌리고, 영원을 꿈꾸고, 영원에 기대어 현재를 산다. 이보다 더 지독한 절연(絶緣)이 없다. 영원을 제대로 우리 마음속에 새길 수 있다면, 우리는 영원 아닌 것들을 분뇨처럼 여길 래디컬이 된다. 연세교회는 참으로 영원을 바라보면서 현재를 사는 래디컬이 많다.

나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구체적으로 그려보지 못했던 부활의 현실을 내 눈으로 목격한 것 같다. 연극 ‘밧줄’의 말미에 사형수로 사형당한 주인공의 부활 장면이다. 지금도 그 장면을 떠올리면 눈가에 눈물이 맺힌다. 너무나 마음이 먹먹하도록 슬프고 가슴 뛰는, 아름답고 눈부신 부활의 광경이다. 죽음을 건넌 후에 우리 앞에 나타나게 될 우리 자신의 부활의 모습, 모든 죄를 하나도 남김없이 깨끗하게 씻어 낸 눈처럼 하얀 두루마기, 주님이 주신 평생 선물 십자가가 내 가슴에 너무도 깊이 아로새겨 이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추한 내 모습을 감춘 그 하얀 두루마기를 입고 있다. 그리고 마치 무중력을 헤치고 나타나는 부활의 몸, 그 몸을 천천히 일으켜서 두 팔을 활짝 하늘로 치켜들어 하나님을 온몸으로 찬양한다. 우리가 그토록 꿈꾸던 부활의 몸은 저토록 눈부시게 펼쳐질 것이다.

현대 설교에서 중요한 것 가운데 하나는 소위 영상화(Visualization), 즉 설교 언어를 통해서 그림처럼 청중들의 마음속에 말씀의 이미지를 새겨 놓는 작업이다. 미디어 시대에 설교가 TV를 이기지 못하는 이유는 바로 그것이다. TV 뉴스와 드라마는 우리의 눈과 귀, 심지어 오감 전체를 사로잡는다. 그래서 청각에 의지하는 설교는 거의 매번 TV에 지고 만다. 그런데 ‘밧줄’ 그 마지막 부활 장면은 내 마음속에 아주 깊이 닻을 내린, 그 자체로 하나의 드라마다. 하나님의 영원을 마치 우리 눈앞에 아주 가까이 현실로 가져다 놓은 느낌이다. 아주 오랜 시간 그 부활의 광경은 내 마음속에서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마치 부활의 그 광경은, 결코 사랑받을 수 없는 추한 ‘야수’(Beast)가 무조건적인 사랑을 받자 사랑의 힘으로 변화되어 아름다운 ‘왕자’(Beauty)로 변하면서, “이게 바로 진짜 내 모습이야!”(It’s me!)라고 소리치는 것과 같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들은 이제 추한 괴물의 가면을 벗어던지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변화된 내 진짜 모습을 드러낸다. 우리는 알고 보면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 다 하나님의 왕자요, 공주다. 모르면 무지한 채로 그냥 지낼 수밖에 없긴 하지만 말이다.


▧ 갈 데까지 가는 죄악의 힘

감옥에 갇힌 한 사형수는 9명을 죽였다.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 “너 한 명을 더 죽이면 딱 10명이 채워지는데….” 죄는 열 명을 채우려는 터무니없는 욕심이 있다. 죄는 그냥 추상적인 것이 아니다. 죄는 누구도 함부로 억제할 수 없는 무서운 힘이다. 그 죄의 힘은 그 열 명을 채우기까지 온 힘을 다해서 우리를 마지막 코너까지 몰아세워 끝까지 간다. 죄는 중단하는 법이 없다. 죄가 우리를 일단 사로잡으면 반드시 소몰이하듯이 벼랑까지 몰아세워 우리를 지옥의 나락으로 떨어뜨리고야 만다. 죄는 열 명을 채우고자 한다. 죄는 갈 데까지 간다. 죄의 힘은 참으로 열심이 넘치고 부지런하다. 죄악과 싸워 본 크리스천은 이 사실을 절감한다.

사람들은 착각한다. 내가 악한 것과 선한 것, 그 사이에서 언제든지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다고…. 이런 생각은 사람이 어떻게, 얼마나 심하게 구겨진 존재인지를 알지 못하는 무지의 소산이다. 사람은 거의 죄악의 유혹을 받을 뿐이다. 선을 향한 유혹은 거의 발생하지 않는다. 가끔 그런 일이 있다고 우긴다. 어린아이가 아무것도 알지 못한 채 우물로 기어간다. 그대로 기어가면 깊은 우물에 빠져서 목숨을 잃는다. 그런 장면에서 사람은 누구든지 측은지심(惻隱之心)으로 그 어린아이를 구하려고 한다. 그래서 사람은 본래 착하다고 우긴다. 이 정도에서는 누구든지 착할 수 있지만, 너무 나이브하다(단순하다). 상황은 늘 훨씬 더 복잡하다. 그 우물 곁의 강물에 천만 원짜리 수표가 흘러가고 있다. 천만 원짜리 수표는 지금 붙잡지 않으면 곧 흘러가서 눈앞에서 사라진다. 천만 원짜리 수표냐, 어린아이의 생명이냐? 이때 어린아이의 생명이 잔인하게 무시되는 유혹에 이끌린다. 사람은 그토록 절망적인, 이미 기울어진 운동장에 살고 있다. 그래서 죄의 힘에 유혹당해서 결국 죄의 노예로 전락한다. 더 비참한 것은 노예는 자신이 노예인 줄을 모른다.

아홉 명을 죽여서 사형당할 처지에 있는 자가 한 명을 더 죽여서 열 명을 채우려는 죄의 의지는 놀랍지만, 그 장면은 죄의 정체를 드러내 준다. 죄악의 힘과 에너지는 한번 우리를 사로잡으면 끝까지 파멸에 이르도록 온갖 열심을 다해서 지옥의 문턱을 넘기까지 한다.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를 사로잡지 않는 한 우리는 철저하게 절망적일 수밖에 없다.



▧ 죽을 준비가 되어 있는가: 감옥


주인공이 달고 있던 빨간 번호표처럼
이 세상 모든 사람은 죽음 앞둔 사형수이니
죽음 이후 영혼의 때를 부지런히 준비하며 살아야


사형수가 감옥에 갇힌다. 그리고 죽음을 기다린다. 그래서 감옥에서 사형수는 특별대우를 받는다. 죽음을 목전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서 죽는다는 사실보다 더 무거운 일은 없다. 그래서 감옥에서조차 사형수는 특별대우를 받는다. 가장 무거운 죽음의 짐을 지고 있기 때문이다. 죽음은 인간 삶의 모든 화려함과 비참함, 높음과 낮음, 부와 가난, 지식과 무지를 완전히 무(無)로 돌려놓는다. 예수님의 비유에서 엄청난 부자와 가난한 나사로는 똑같이 죽음을 지나야 한다. 죽음 앞에서 엄청난 부와 지독한 가난이 사라지고,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고 만다. 죽음은 모든 사람을 평준화한다. 그래서 감옥 안과 밖이 다르지 않다. 어차피 죽음을 앞둔 사형수 신세들이다.

믿음 좋고, 예쁘고 사랑스럽게 생긴 여자 전도사님은 감옥에 갇혀 있는 사형수에게 “빨간 번호표를 달았네요”라고 한다. 얼마 있으면 사형당할 사형수라는 표시고, 알고 보면 너도 나도 모두 다 이토록 빨간 표시를 달지 않은 자가 어디 있는가? 감옥 안이건 감옥 밖이건 관계없다. 아무리 깊이 숨겨 놓았다 해도 우리는 가끔 그 빨간 사형수 표시를 꺼내어 자세히 들여다보면서 죽음을 마주 대한다. 그러곤 놀라서 다시 그 빨간색 표시를 깊이 감추어 놓고 다시는 생각도, 보지도 않으려 하지만 끝내 우리의 생각에서 죽음을 완전히 떨쳐 버리지는 못한다. 완전히 자신을 망각하는 치매에 걸리지 않는 한 말이다. 그토록 죽음은 멀리 있는 듯, 가까이 있는 듯이 우리를 늘 맴돌고 있다.

이 세상 모든 사람은 한 사람도 빠짐없이 빨간 사형수 표식을 몸에 지니고 산다. 애써서 감추려 하지만 문득 술 취하지 않은 밤중 맑은 정신으로 잠자리에 누웠을 때, ‘나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라는 생각이 들면, 그래서 ‘나도 언젠가 죽겠지’, 그리고 ‘죽은 다음은 이대로 끝인가’ 하는 불안한 생각이 들면 잠 못 이루는 끔찍한 밤이 되곤 한다. 그리고 다음 날 죽음에 대한 생각을 머리 속에서 싹 지워 버리고 하루를 지나고 또 한 달을, 또 1년, 10년, 50년을 보내고, 죽음을 맞이한다. 그의 생각 속에서 죽음을 없애 버릴 뿐 죽음은 결코 그를 떠나지 않는다. 스스로 죽음을 앞둔 감옥의 사형수가 아닌 체해도, 알고 보면 모두 다 감옥 속 사형수다.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두고 감옥은 그리 멀지 않다. 감옥에서 가장 즐거웠던 100일이 감옥 밖의 불행한 하루만 못하다고 한다. 담장 밖이 아무리 불행해도 담장 안의 행복보다는 낫다. 아주 오래전에 12시 통금시간이라는 게 있었다. 철야기도를 하고서 아무 생각없이 교회에서 집으로 가는데, 경찰이 오라고 해서 갔더니 12시 통금위반이라고 해서 유치장에서 성경책을 끼고서 하룻밤 신세진 적이 있다. 나는 그때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하룻밤의 지옥을 경험했다. 다음 날 아침에 은평구 경찰서를 나오는데, 얼마나 햇살이 밝았는지 지금도 기억한다. 감옥도 시간이 지나면 편해지려나 모르겠다. 아마도 그럴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도저히 살 수 없을 것이니 말이다. 사람은 놀라운 적응력으로 상상치 못한 처지에서도 스스로 자신을 감옥에 알맞도록 처신해 간다.

감옥 속 사형수는 진짜 내 모습이 아니다. 내 참된 모습은 거듭나서 하나님의 생명이 함께하는 그리스도로 옷을 입은 자로서, 이제 감옥이 아니라 천국에 적응되어 가는 모습이다. 거듭난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사형수의 감옥이 아니다. 그래서 우리는 점점 더 이 세상이 낯설어지고, 생소해지고, 서툴러진다. 우리는 본래 하나님의 생명을 지닌 천국에 익숙한 자들이고, 점차로 더욱더 성령님의 도움으로 천국에 적응된 자들로 변모할 것이다. 감옥은 우리가 살 곳이 아니다!

연극 ‘밧줄’의 죄수들이 감옥에서 하는 일이 있다. 봉투를 붙이는 작업이다. 그런데 왜 봉투를 붙이는지 이유를 알지 못한다. 드디어 봉투 작업의 비밀을 알게 된다. 비밀은 이것이다.

“아, 봉투 붙이는 거 이제 지겹다. 아니 근데 형님. 이 교도소는 왜 이렇게 봉투를 붙이라 그러는 거여! 뭐에 쓰는 거여? 이거? 몰랐냐? 뭔데요. 형님 알아요? 잘 들어 봐. 우리가 여기서 열심히 봉투를 붙이잖아. 그럼 옆방에서는 뭘 하느냐. 봉투를 뜯어. 우리가 열심히 붙이면 옆방에서는 뜯어. 우리가 천 개를 붙였다? 그럼 옆방에서는 천 개를 뜯어. 에이~ 설마요~ 진짜여. 이걸 언제까지? 늙어 뒤질 때까지….”

사람은 의미를 찾는 존재고, 무의미 앞에 스스로 무너지고 만다. 감옥은 우리가 거처하는 벗어날 수 없는 작은 공간이다. 그러나 감옥이라는 이 세상의 무서운 현실은 무의미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이다. 나치스가 유대인들을 감옥에 가두고 그들을 불러서 일을 시키는데, 저쪽의 쌓아둔 모래를 이쪽으로 옮기게 한다. 그리고 그 모래를 다 옮기면 또다시 그 모래를 저쪽으로 옮기게 한다. 며칠을 그렇게 하자, 유대인 중 몇 명이 미쳐 버리고 만다. 사람은 무의미를 견디지 못한다. 이 세상은 그 내부에서 어떤 궁극적 의미도 찾지 못한다. 감옥은 밖으로 나갈 때에야 비로소 의미가 발견된다.


<사진설명> 황민선 전도사(심현은 분)가 검사를 만나 남편을 죽인 범인이 자기가 교화 전도를 담당한 사형수 이호성이라는 사실을 알고 충격받는 순간. 강문구 기자

<사진설명> 남편이 칼에 찔려 죽으면서도 마지막 순간까지 전도하려 했던 이호성을 주님 마음으로 품고 용서하는 황민선 전도사. 강문구 기자

<사진설명> 예수 믿고 구원의 기쁨을 맛본 후 감방 안에서 천국을 소망하며 성경을 읽는 이호성. 강문구 기자

<사진설명> 사형대 밧줄에 묶여 목숨은 마감하지만, 예수의 십자가 피 공로를 믿었기에 영혼은 참된 자유를 얻어 빛이신 주님을 향해 달려가는 이호성의 모습. 강문구 기자


▧ 죽을 준비가 되어 있는가: 천국

C. S. 루이스의 동화에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배를 타고 항해를 해서 드디어 천국 입구에 들어선다. 발을 잘못 디뎌서 바다에 빠진다. 그리고 바닷물을 마시는데, 바닷물 맛이 전혀 다르다. 지금까지 맛봤던 그 어떤 물맛도 천국 바닷가의 물맛을 따라올 수 없다. 지금까지 먹었던 아무리 맛있는 포도 알갱이도 그 맛을 따라오지 못한다. 아! 이 맛은 지금까지 그렇게 소망하고 바라던 그 맛이었는데, 지금 내가 직접 먹어 보고서야 그 맛을 알 수 있어요! 그래 바로 이 맛이야! 어렴풋이 알았던 바로 그 천국의 향기와 광경과 맛의 깊이, 그때 가서야 비로소 알게 된다. “내가 지금까지 그토록 바라고 그리워했던 바로 그 맛보다 훨씬 더 달콤한 맛이야!”

지금 청춘들에게는 생소할지 모르겠지만, 오래전에는 편지만으로 남녀가 사귀기도 했다. 서로 사진을 보면서 편지로 답답하게 사귄다. 오랫동안 편지를 주고받다 보면 어언 간에 이미 내가 그 사람을 잘 알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단 한 번도 얼굴을 보지 못한 사귐이라 해도 이미 지울 수 없을 정도로 내 마음을 차지하고 있다. 이제는 너무도 그립고 보고 싶다. 사진으로는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보고 싶다. 그래서 아무리 멀고 험하다 해도, 기차를 타고, 버스를 타고, 걷고 걸어서 사진 속 연인을 만나러 간다. 그토록 보고 싶어서, 사모하고 그리워하면서, 품에 있는 사진을 꺼내 보면서 얼굴을 상상하고 그리면서 만난다. 그래서 드디어 만났다. 막상 만나 보니 사진보다 훨씬 더 예쁘고 아름답다! “실물이 훨씬 더 낫다!”는 말은 그래서 나왔다. 사진은 비교가 안 된다. 사모하면서 온맘 다해 그리워하다가 막상 그의 얼굴을 보고서 정신이 혼미하도록 황홀해 본 적 있는가? 이 세상이 주는 그 어떤 기쁨에 비할 수 없는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는 천국의 달콤함!

천국은 무엇일까? 흔히들 예수 믿는 자들이 죽은 다음에 가는 곳으로 생각하는데, 예수님은 막상 다르게 말씀하신다. 천국이 이 땅에 이미 이르렀다고 말씀하신다. 또 천국이 앞으로 다가올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천국은 ‘현재’ 우리 안에 이미 이루어졌다. 그리고 천국은 ‘미래’에 우리가 거주할 곳이다. 그래서 천국은 이중적이다. 천국은 우리의 죽음 이후 ‘미래’에 경험할 하나님이 예비하신 공간이지만, 우리는 ‘현재’ 우리 안에 이루어진 천국을 경험한다. ‘현재’ 천국을 경험하지 못한 자는 ‘미래’의 천국을 경험할 수 없다. 현재 연인의 사진을 갖고서 희미하게 그려 보지 못한 자들은 결코 실제로 그 연인을 보고도 알 수 없고, 볼 수도 없다. 그림자처럼 뚜렷하지 못하다 해도 여전히 사랑하고 사모하는 우리 주님을 ‘현재’ 경험하지 못하고 알지 못하는 자는 ‘미래’ 그때 가서도 주님을 알지 못한다.

천국은 이미 우리 마음속에 앞서서 이루어졌다. 우리는 연세중앙교회를 통해서 천국을 현재 경험한다. 완벽한 천국 경험은 미래에 가서 이루어진다. 천국의 본질은 어떤 장소가 아니라, 어폐(語弊)가 있긴 해도 하나님이 계시는 공간이다. 하나님은 공간에 갇혀 계시지 않기 때문이다. 천국의 핵심이 바로 하나님이시라면,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거할 때 바로 그곳이 천국이다. 그래서 우리는 교회 안에서 하나님의 천국을 경험한다. 교회 안에서 미리 주어지는 천국을 경험하지 못하는 자는 죽음 후의 천국도 경험하지 못한다. 우리는 물론 죽음 후에 천국을 우리의 신령한 몸으로 마음껏 실물로 경험하게 된다. 그러나 우리의 눈이 아직도 희미하기 때문에 천국을 온전하게 경험하지 못한다. 이는 마치 그림자처럼 그분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모세와 같다.

그래도 감옥 같은 이 세상을 살아가기에는 충분할 정도로 우리에게 말씀을 주시고, 연세중앙교회를 주시고, 사랑하는 윤석전 목사님을 주시고, 성도들을 주시고, 절망이 다가와도 여전히 다시 일어서서 미래에 일어날 몸의 부활을 지금도 경험하고, 현재 우리 가운데 이루어진 천국을 경험하고, 아픔이 있어도 더욱더 자신을, 자기 목숨을 대속물로 주셔서 죄와 사망과 지옥의 영원한 고통에서 구원하신 은혜에 감사하니 자신을 거룩하게 드려 매일 하나님의 은혜가 넘치는 삶을 감사함으로 살아간다.


▧ 나가면서


연세중앙교회 청춘들이 부럽다


<사진설명> 성극 밧줄의 피날레 곡  ‘내 영혼이 은총 입어’를 찬양하며 주님께 영광 올려 드리는 배우들. 강문구 기자

‘밧줄’은 우리가 처한 현실을 참으로 마음 시리도록 그려 낸다. 그래서 지루할 틈이 없이 웃다가, 울다가, 그런데 흐르는 눈물이 아무래도 그치지 않는다. ‘밧줄’이 그려 내는 아픔과 슬픔 때문에, 천국의 기쁨과 환희 때문에. 그리고 그 흐르는 눈물은 영적인 카타르시스를 준다. 마치 죽음과 부활을 직접 경험한 듯 마음과 영혼의 정화가 일어난다. 연극 ‘밧줄’은 죽음과 생명과 희생과 부활과 우연을 가장한 섭리를 참으로 생생하게 우리 앞에 가져다 놓는다. 죽음을 가까이서 경험하게 하고, 부활을 눈앞의 현실로 경험토록 한다. 참으로 경이로운 교회고, 놀랍도록 치밀한 연극이다. 어떻게 저런 사형수 실화를 교회에서 연출해 공연 할 수 있는지, 얼마나 많은 성도가 목사님과 함께 세밀하게 준비했고, 얼마나 현장에 강한 청춘들인지! 연세교회 청춘들이 참으로 부러울 뿐이다. 젊음을 주님께 이토록 아름답고 멋지게 사용하는 것이 얼마나 귀한 축복인지!

 


/김병제 목사
前 기독교한국침례회 총회 기획국장
미 남침례신학교 목회학 박사
 


위 글은 교회신문 <558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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