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대곤 목사 칼럼] 나를 불쌍히 여겨 주소서!

등록날짜 [ 2023-11-08 11:45:59 ]

마가복음 강해(18)

예수께서 갈릴리 지방을 떠나 지중해 동쪽 해안에 있는 이방 지역인 두로 지경으로 들어가십니다(막7:24). 거라사 지방의 광인이 고침받고 온 데가볼리 지역에 예수의 소문을 전하자(막5:20) 수많은 사람이 예수께 와서 병을 고쳐 달라고 합니다. 사람들이 몰려오는 바람에 복음을 전할 틈이 없자 한 집에 들어가서 아무도 모르게 하셨으나 숨길 수 없었습니다.


이에 더러운 귀신 들린 어린 딸을 둔 한 여자가 소문을 듣고 예수께 찾아왔습니다(막7:25). 이 여인은 자신의 딸을 고치려고 수많은 노력을 했을 것입니다. 의원을 찾아가고 당시 베니게(페니키아) 사람들이 숭배하던 신에게도 빌어 보았겠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여인은 귀신 들려 고통받는 딸을 볼 때마다 아무것도 해 줄 수 없다는 무기력함에 가슴이 미어지는 고통을 감내해야 했습니다. 그러던 중 이스라엘 땅에서 수많은 병자를 고치고 이적을 행하신 예수께서 가까이 계시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달려온 것입니다. 예수님의 발아래 엎드려 딸에게서 귀신 쫓아 주시기를 간구하는 여인은 다급하고도 절실했습니다.


여기에서 모든 문제 해결의 출발점이 주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는 것임을 집중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당하는 고난과 위기는 그 자체로 보면 있어서는 안 될 불행이며 비극입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것이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해 주는 기회일 수 있기에 영적인 측면에서 볼 때 축복의 통로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자기 딸을 고쳐 달라고 간구하는 수로보니게 여인에게 냉혹하게 말씀하십니다.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찌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막7:27). 여기에서 자녀는 유대인을 말합니다. 당시 유대인은 이방인을 개 취급하며 부정하게 여겼는데, 예수님의 말씀도 “유대인인 내가 유대인에게 먼저 이적을 베풀고 말씀을 전해야지, 부정한 이방인인 너에게 왜 이적을 베풀어야 하느냐”라는 뜻입니다.


사랑의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시는 데는 분명한 목적이 있었습니다. 여인의 믿음을 시험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예수님은 여인이 엎드려 간구할 때부터 이미 그녀에게 믿음이 있음을 보시고 그녀의 간구를 들어주실 것을 작정하고 계셨습니다. 다만 그녀의 믿음을 사람들 앞에서 드러내고 강화하고자 매몰차게 대하신 것입니다. 실제로 예수께서는 시험의 관문을 통과한 여인에게 크나큰 축복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실 은혜와 축복이 클수록 이에 상응하는 시험과 장애물이 우리 앞에 놓일 때가 있습니다. 보통 사람은 받지도 못할 큰 축복을 아브라함에게 내리기 전 아들 이삭을 바치라는 엄청난 시험을 하신 것처럼 말입니다(창22:1~2).


우리가 정말 주를 찾는지 아닌지를 시험하실 때, 주님께 매달려야 하는데도 어떤 사람은 ‘내가 이런 대접을 받으려고 교회에 왔는가?’라며 시험에 빠집니다. 아무리 주님이 나를 밀어내더라도 내가 살려고 주님께 붙어 있어야 하는 것이 주님과 우리의 관계입니다. 주님께서 말씀으로 “네가 죄인이다”라고 하실 때 “맞습니다.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은혜를 구해야지, “내가 이렇게 정죄받으려고 교회에 다니느냐”라며 자존심 탓에 마귀에게 미혹당해 믿음에서 떨어지면 안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 긍휼을 구하는 복된 자세

예수님의 말씀에 여인이 대답합니다.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의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막7:28). 여인은 자신이 ‘개’처럼 취급받았는데도 서슴없이 자신을 낮추며 겸손하게 답변했습니다. 주님을 향한 믿음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이 여인은 베니게 지방의 이방인이었습니다. 베니게는 시돈과 두로처럼 항구가 있어 무역이 발달한 풍요로운 곳이었습니다. 당시 국제적으로 잘 알려진 헬라 문명에 속한 여인이므로 나름대로 자부심도 있었을 것입니다. 이름 없는 나사렛 작은 마을의 선지자 앞에 나아와 엎드려 절하고, 여러 사람이 보는 앞에서 자신을 개라고 부르는데도 이를 기꺼이 받아들이며 그 은혜의 부스러기라도 취하게 해 달라고 간구한 것입니다. 이 얼마나 겸손하며 믿음 있는 자세입니까.


오늘날 우리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입으로는 겸손을 외치면서도 항상 상석에 앉으려는 사람이 많습니다. 더구나 하나님의 은혜를 부스러기만큼이라도 받으면 감사할 일인데, 통째로 주지 않으면 받지 않겠다고 떼쓰는 사람도 적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라면 부스러기라도 좋고, 시편 기자처럼 “하나님의 문지기도 좋다”라며 낮은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시84:10).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할 모습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두 손을 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나는 이렇게 주님 앞에 항복합니다. 나를 긍휼히 여겨 주시옵소서.” 그냥 형식적으로 손을 드는 것이 아니라 긍휼히 여겨 주기를 소원하며 간구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긍휼히 여김을 소원한 여인의 간구에 결국 예수께서 응답하셨습니다. “돌아가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느니라”(막7:29). 여자가 집에 돌아가 본즉 아이가 침상에 누웠고 귀신이 나갔습니다(막7:30).


많은 사람이 문제를 앞에 두고도 주님께 기도하지 않습니다. 이는 주님을 신뢰하지 않고, 주님의 능력을 확신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신뢰한다면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이 이방 여인이 간구하여 긍휼히 여김을 받은 것처럼 우리에게도 구하라고 당부하십니다. 여인은 긍휼히 여김을 받아 딸이 고침받았지만, 주님께서 진짜 해결해 주고 싶은 것은 단회적인 육신의 질병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는 영원한 죄 문제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율법을 주신 목적은 율법으로 죄를 발견하고 죄인인 내 모습이 얼마나 불쌍한지를 깨닫도록 하시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와서 죄 사함받기를 소원하며 살려 달라고 회개해야 하는 것입니다. “나는 주님이 필요합니다. 나를 불쌍히 여겨 주소서”라며 하나님 앞에 내 죄를 찾아 해결해 달라고 긍휼히 여김받기를 소원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반응입니다.

<계속>


위 글은 교회신문 <823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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