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대곤 목사 칼럼]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등록날짜 [ 2023-12-29 17:06:15 ]

자기 부인과 십자가 진다는 것은

자기 생명까지 버리겠다는 각오

구원받았다면 예수의 속죄의 피

감사해 주님만 좇을 수밖에 없어


갈릴리에서 북쪽으로 40km 떨어진 ‘가이사랴 빌립보’는 분봉왕 헤롯 빌립이 로마의 환심을 얻고자 로마를 그대로 재현해 놓은 도시입니다. 그래서 도시 이름도 당시 로마 황제인 ‘티베리우스 카이사르’와 자신의 이름 ‘빌립’을 합쳐 ‘가이사랴 빌립보’라고 명명했습니다.


예수께서 이 지역을 지나면서 전도 사역을 하실 때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막8:27)라고 묻습니다. 제자들은 “침례 요한이라 하고 더러는 엘리야, 더러는 선지자 중의 하나라고 한다”라고 답변합니다. 당시 사람들은 예수님을 다양하게 평가했으나, 예수님이 누구신지 바로 알지 못했기에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지 못하고 도리어 배척하여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그릇된 평가와 오해는 오늘날에도 여전합니다. 4대 성인, 기독교 창시자 등 아무리 훌륭하게 평가하더라도 예수님이 ‘내 죄를 대속하려고 십자가에 피 흘려 죽어 주신 그리스도’라고 바로 알지 못한다면 다 헛것입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사람만 구원받기 때문입니다.


곧이어 예수께서 제자들을 향해 “너희들은 나를 누구라 하느냐”(막8:29)라고 물으십니다. 주님께서 알고 싶으신 것은 세상 사람들의 생각이 아니라 제자들의 생각이었습니다. 주님을 아는 지식과 신앙만 구원에 이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도 중에는 예수님을 단지 병을 낫게 하고 복을 주는 분 정도로 이해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을 잘못 이해하면 예수님을 올바로 섬길 수 없고 진정한 구원에 이를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려고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3일 만에 부활하신 구세주이심을 분명히 알고 고백해야 합니다. 주님은 오늘도 우리를 향해 물으십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주님의 물음에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라는 말은 헬라어로서 ‘메시아’, 하나님이 쓰려고 ‘기름 부음을 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당신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구약의 예언대로 오신 그리스도로서 우리를 구원할 자”라는 고백입니다.


이 고백을 들은 주님은 자기의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경계하신 후 비로소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막8:31). 제자들에게 “너희가 나를 그리스도라고 했지? 내가 그리스도로서 할 일이 바로 고난받고 죽고 부활하는 것”이라고 드러내 놓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마가복음에서는 그 말씀을 들은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간(諫)하였다고 짧게 기록하고 있습니다(막8:32). 그러나 마태복음을 보면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마16:22)라고 그리스도의 고난을 매우 강하게 반대합니다. 베드로는 예수를 로마의 압제에서 자신들을 구할 정치적 메시아로 알았고, 예수께서 로마를 멸하고 장차 유대인의 왕이 되면 자신도 영광의 자리에 앉으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주께서 죽으시겠다고 하자 결코 그럴 수 없다고 만류한 것입니다. 


주님은 베드로의 말과 행위가 사단의 역사로 나온 것임을 아시고 베드로를 향해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라고 꾸짖으셨습니다. ‘사단의 일’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는 일을 가로막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길, 생명의 길

이어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서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막8:34)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인간적인 모든 정욕과 탐심을 버리고 생명까지 버리겠다고 각오하는 것을 말합니다. 주님의 요구는 베드로 같은 제자들도 걸려 넘어질 만큼 어렵고 힘든 길입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자는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 목적을 알기에 “내가 죄인이 맞습니다”, “주님이 지신 십자가는 바로 내가 져야 할 십자가입니다”라고 겸손히 고백하며 주님을 좇을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막8:36~37).


여기에서 ‘온 천하’는 사단이 그리스도께 보였던 천하만국과 영광, 권력, 명예 등 인간이 추구하는 모든 것을 의미합니다(마4:8). 세상 사람 모두가 헛된 영광을 좇아가지만 우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십자가의 길을 가야 합니다. 세상의 헛된 것들 대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 영원한 생명을 얻는 진정한 성공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주님께서는 장차 하나님의 영광으로 다시 올 때 하늘의 천군 천사 앞에서 그리스도와 복음을 수치스럽게 여기며 증거하기를 꺼린 모든 자들을 자신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자들로 여기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막8:38).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참혹한 십자가형으로 죽은 예수를 구주로 믿는 일이 당시에 얼마나 부끄러운 일이었겠습니까.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세상이 꺼려 하는 복음을 선포한다는 것은 대단한 믿음과 용기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기도하여 인간의 힘만으로는 걷기 어려운 십자가의 길을 갈 수 있도록 동력을 얻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고난받으시고 십자가에 달려 피 흘려 죽으신 후 3일 만에 부활하신 사건은 그리스도를 증명하는 가장 큰 표적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사람은 십자가와 부활을 생각하지 않고, 성탄절에 아기 예수만 떠올립니다. 성도라면 예수님을 생각할 때 그 어떤 사건보다 십자가와 부활의 표적을 기억하고, 이 땅에 우리의 죄를 해결하시려고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러 오신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예수께서 고난받고 죽으신 십자가를 바라본다면 예수님이 누구신지, 무엇을 하시는 분인지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 십자가를 지고 목숨까지 초월하며 복음을 전하는 것이 제자들의 할 일이고 바로 우리의 할 일인 것입니다.



마가복음 강해(22)



위 글은 교회신문 <830호> 기사입니다.

    아이디 로그인

    아이디 회원가입을 하시겠습니까?
    회원가입 바로가기

    아이디/비번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