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날짜 [ 2025-04-16 15:59:07 ]
4월은 언제나 자연의 변화가 한창입니다. 박목월 시인의 가곡 ‘사월의 노래’도 “목련꽃 그늘 아래서”로 시작해 “빛나는 꿈의 계절아 눈물 어린 무지개 계절아”로 마무리됩니다.
겨우내 움츠렸던 생명들이 고요히 머물다 조금씩 고개를 내밀기 시작합니다. 목련, 개나리, 산수유, 벚꽃, 진달래가 꽃망울을 머금더니 시나브로 양지바른 곳부터 흐드러지게 피어납니다. 따스한 햇살과 봄바람이 나뭇가지와 꽃을 흔들며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는 4월은 우리의 마음에도 새로운 시작을 불러옵니다.
무엇보다 4월이 특별한 이유는 고난주간과 부활절이 있기 때문입니다. 자연의 태동과 맞물려 우리의 신앙에서 예수님의 고난과 부활은 깊은 의미를 되새기게 합니다.
고난주간은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음을 맞이하시고, 그 죽음을 통해 인류에게 죄 사함의 은혜를 주심을 감사하는 주간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이르기까지 받으신 모든 고난은 바로 우리의 죄 때문이었습니다. 그분이 찔리고 상하신 것은 우리의 허물과 죄악 때문이었습니다. 그분이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분이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는 나음을 입었습니다(사53:5~6).
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는 우리의 영혼을 새롭게 하고,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는 능력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5:8)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우리의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분리되었지만, 예수의 고난과 사망 권세를 이기신 부활을 통해 하나님과 다시 화목하게 되었습니다.
이어지는 부활절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망을 이기고 다시 살아나신 사건은 기독교 신앙의 핵심입니다. 예수님이 주신 부활의 능력은 우리에게도 새로운 시작을 가능하게 하며, 우리가 그분의 부활에 참여할 때 죄와 사망의 권세를 이기고 영원한 생명을 소망하게 됩니다.
영생을 주신 예수의 고난과 부활
하루는 어느 집 앞을 지나가다가 대문 앞에 쌓인 쓰레기가 보였습니다. 하루 이틀이 지나자 누군가가 그 자리에 또 다른 쓰레기를 두고 갑니다. 처음에는 주인이 더러워서 치우지만, 치우고 또 치워도 새로운 쓰레기가 쌓입니다. 사람들이 한 번 쓰레기를 버리면, 그 자리가 쓰레기 버리는 자리가 되어 악습이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그 모습을 보며 고난주간과 부활절을 떠올렸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지고 고난을 받으셨을 때 예수님도 쓰레기 같은 우리의 죄를 해결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날마다 죄를 지을 때 그 죄가 마치 집 앞에 놓인 쓰레기처럼 계속 쌓여 갔지만, 예수님은 그것을 대신 해결해 주셨습니다. 치워도 치워도 끝이 없는 쓰레기처럼, 그분은 우리의 죄를 대신 지고 끊임없이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고통을 이겨 내시며, 우리에게 진정한 구원의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쓰디쓴 고난을 그의 몸으로 온전히 감당하셨고, 결국 그 고난의 길은 모든 인류를 위한 구원의 길이었습니다. 고난은 단지 고통 그 자체가 아니라, 결국 생명을 낳는 씨앗이 됩니다. 예수님이 찔리고 상하고 징계를 받고 채찍에 맞으시어 결국 인류의 죄를 해결하고 우리를 새롭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치러야 할 지옥 형벌을 대신 치러 주시고, 그 끝에서 부활이라는 새로운 시작을 허락하셨습니다.
고난과 부활은 우리의 신앙 여정에서 중요한 이정표이자 매년 4월마다 새롭게 되새겨야 할 교훈입니다. 아무리 삶의 큰 고난에도 희망을 잃지 말고 부활을 통해 새로운 시작을 맞이하는 것. 그것이 우리가 신앙 안에서 살아가는 이유이자 하나님께서 이달을 통해 우리에게 주시는 깊은 의미입니다.
4월도 두 주가 흘러갑니다. 자연의 아름다움과 생명의 소생처럼, 우리의 신앙도 그리스도의 고난과 부활을 통해 새로운 생명을 얻습니다.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치르신 고난은 우리가 다시 살아갈 수 있는 이유가 되며, 그 부활의 능력은 우리에게 천국 소망을 주기에 충분합니다. 천국의 기쁨을 가진 우리가 이번 예수사랑큰잔치에 수많은 이웃을 초청하여 주 안에서 함께 구원의 기쁨을 누리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위 글은 교회신문 <895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