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칼럼] 알고리즘이 학습한 원죄의 문법

등록날짜 [ 2025-09-05 10:50:47 ]

17C 신학자 통찰한 죄의 작동 원리

유튜브 알고리즘 설계 원리와 일치

작은 유혹이 중독 가져와 일상 파괴


유혹의 도구는 다채롭게 변화하지만

인간 본성과 죄의 작동원리는 그대로

디지털 시대를 사는 그리스도인들도

오직 복음으로 지혜롭게 분별해야


17세기 청교도 신학자 존 오웬이 쓴 『내 안의 죄 죽이기』는 죄의 작동 원리를 분석해 소개하고 있다. 그런데 존 오웬이 밝힌 죄의 작동 원리가 21세기 유튜브 알고리즘의 설계 원리와 놀랍도록 일치한다는 사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오웬은 죄가 “끊임없이 우리를 속이고 유혹하며”, “항상 극단을 추구하는 속성”을 지닌다고 분석했다. 그의 통찰은 350년이 지난 오늘, 디지털 플랫폼의 중독 메커니즘을 정확히 설명하고 있다.


알고리즘이 학습한 유혹의 고전 문법

유튜브의 ‘추천 알고리즘’은 정교한 3단계 포획 전략을 구사한다. 처음에는 우리가 검색한 내용과 유사한 영상으로 친근하게 다가온다. “이 영상도 보실래요?”라는 겸손한 제안은 우리의 방어막을 쉽게 무너뜨린다. 이어서 알고리즘은 미묘한 변주로 유튜브에 체류하는 시간을 연장시킨다. 10분짜리 교육 영상으로 시작한 시청은 어느새 관련성이 희미한 엔터테인먼트의 늪으로 우리를 이끈다. 마침내 매일 같은 시간, 같은 자세로 화면 앞에 앉는 것이 일상의 의식(儀式)이 되어 버린다.


이러한 점진적 확장 과정은 오웬이 묘사한 죄의 작동 방식과 정확히 일치한다. 그는 “죄는 우리를 유혹할 때 작은 것에서 시작해 점점 더 큰 것으로 이끈다”라고 경고했다. 야고보서의 통찰은 더 날카롭다.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1:14~15). 작은 호기심이 습관이 되고, 습관이 중독이 되며, 중독이 삶을 지배하는 과정은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다.


<사진 설명>존 오웬著 『 내 안의 죄 죽이기』

알고리즘의 천재성은 인간 본성의 취약점을 정확히 간파했다는 데 있다. 즉각적인 만족, 새로움에 대한 끝없는 갈망, 수동적 쾌락의 추구 등 이는 모두 영성 훈련이 전통적으로 극복하고자 했던 육체의 욕망들이다. 갈라디아서가 경고하는 ‘육체의 일’(갈5:19~21)은 오늘날 스크린 뒤에서 더욱 교묘하게 작동한다.


오웬은 “성령을 배제한 모든 수단과 방법은 헛되다”라고 단언했다. 이 관점에서 보면 스크린타임 제한 앱이나 디지털 디톡스 프로그램의 한계는 명백하다. 이는 그가 비판한 중세 수도원의 고행과 다르지 않다. 외적 통제를 아무리 강화해도 내적 변화가 없다면 소용없는 일이다. 로마서가 말하듯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롬8:5)한다. 기술적 해결책만으로는 마음의 방향을 바꿀 수 없다.


또 현대인은 자신이 콘텐츠를 ‘선택’한다고 믿지만, 실상 우리는 알고리즘이 차려 놓은 뷔페에서 그저 골라 먹을 뿐이다. “사람의 행위가 자기 보기에는 모두 정직하여도 여호와는 심령을 감찰하시느니라”(잠21:2). 잠언이 통찰하듯, 우리는 자율적인 선택이라고 믿지만 그 선택을 조종하는 보이지 않는 손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이 같은 디지털 소음이 영적 감수성을 마비시킨다는 점이다. 시편은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찌어다”(시46:10)라고 권하지만, 알고리즘은 끊임없는 자극, 쉴 새 없는 알림, 계속되는 새로움 등 정반대를 추구한다. 엘리야가 거센 바람이나 지진이 아닌 ‘세미한 소리’(왕상19:12)로 하나님을 만난 것처럼 영적 각성은 고요함을 요구한다. 그러나 알고리즘이 만든 소란 속에서 그 세미한 음성을 듣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디지털 결박에서 자유할 방법 ‘오직 복음’

오웬의 통찰 중 가장 핵심적인 것은 진정한 자유가 의지력이 아닌 은혜에서 온다는 깨달음이다. “가장 큰 기적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음으로 나의 죄 문제를 해결받고 창조주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 이 복음의 본질이 디지털 시대에도 유일한 해답이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갈라디아서는 선언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갈5:1). 이 자유는 스마트폰을 던져 버리는 극단적 금욕이 아니다. 더 깊은 만족을 알고, 더 큰 기쁨을 발견하는 것이다. ‘조회 수’와 ‘좋아요’가 주는 일시적 도파민이 아닌 “너희는 값으로 사신 것”(고전7:23)이라는 복음의 확신이 우리의 정체성을 재정립한다.


다니엘이 바벨론의 왕궁에서도 뜻을 정하여 왕의 음식을 거부한 것처럼(단1:8), 우리도 디지털 바벨론에서 거룩한 경계를 설정해야 한다. 전도서가 말하는 “천하에 범사가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나니”(전3:1)라는 지혜를 일상에서 적용해 볼 수 있다.


아침의 첫 시간을 스마트폰이 아닌 말씀과 기도에 할애하는 것, 식사할 때 가족과 눈을 맞추고 대화하는 것, 저녁 일정 시간 이후 모든 기기를 끄고 고요 속에서 하루를 정리하는 것. 이러한 경계들은 율법적 규제가 아니라 자유를 위한 선택이다. 침실을 휴식과 기도의 장소로, 식탁을 교제와 감사의 시간으로, 예배당을 디지털 기기에서 자유로운 성전으로 구별하는 것이다.


빌립보서는 권면한다.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무엇에든지 칭찬할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빌4:8). 금식이 굶주림이 아니라 더 중요한 것에 집중하려는 영적 훈련이듯, 디지털 절제 역시 비움이 아닌 채움의 과정이다. 유튜브의 자리를 시편 묵상으로, SNS의 시간을 이웃과의 진정한 만남으로, 넷플릭스의 밤을 가족과의 깊은 대화로 채워 가는 것이다.


교회의 역할…함께 이기고 다음세대 가르쳐야

전도서는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은 저희가 수고함으로 좋은 상을 얻을 것임이라”(전4:9)라고 말한다. 알고리즘과의 싸움은 개인의 의지만으로는 버거운 전투이다. 서로의 스크린타임을 점검하고, 건강한 대안을 함께 모색하고, 실패했을 때 정죄가 아닌 격려로 다시 일으켜 세우는 공동체가 필요하다.


초대 교회가 로마의 우상숭배 문화와 싸웠듯이, 현대 교회는 디지털 우상과 대면해야 한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12:2)라는 바울의 권면은 오늘날 더욱 절실하다. 교회는 디지털 안식일을 실천하고, 가족 단위의 미디어 교육을 제공하며, 청소년에게 건강한 디지털 사용법을 가르치는 변화의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기술 자체는 중립적이다. 바울이 로마의 도로망을 복음 전파에 활용했듯이, 우리도 디지털 도구를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 사용할 수 있다.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이 아니요”(고전10:23)라는 원칙 아래, 분별력 있는 사용이 핵심이다. 온라인 성경공부 확산, 믿음의 콘텐츠 제작과 공유, 복음 전파를 위한 새로운 플랫폼 활용 등 이 모든 것이 가능하다.


신명기는 명령한다.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신6:7). 우리의 자녀들은 더 정교하고 강력한 알고리즘과 마주할 것이다. 지금 우리가 배우고 실천하는 영적 분별력과 절제의 지혜가 다음 세대를 위한 유산이 되어야 한다. 기술의 발전 속도가 아무리 빨라도 영적 성숙의 필요성은 변하지 않는다.


고전의 신령한 지혜, 성도의 복된 선택

존 오웬의 350년 전 통찰이 오늘날 디지털 중독을 정확히 설명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이미 있던 것이 후에 다시 있겠고 이미 한 일을 후에 다시 할찌라 해 아래는 새 것이 없나니”(전1:9). 전도서가 통찰하듯 유혹의 도구는 변했지만 인간의 본성과 죄의 작동 원리는 변하지 않았다.


디지털 시대를 사는 그리스도인에게 필요한 것은 최신 앱이나 혁신적인 프로그램이 아니다. 변하지 않는 복음의 능력을 새로운 상황에 지혜롭게 적용하는 분별력이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갈2:20)라는 바울의 고백이 스마트폰을 든 손에서도 나올 수 있을 때 우리는 진정한 자유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알고리즘이 지배하는 시대에도 우리에게는 여전히 선택의 자유가 있다. 그것은 무엇을 볼 것인가의 선택이 아니라, 어떻게 살 것인가의 선택이다. 그 선택의 순간마다 2000년 전 십자가의 은혜가 우리와 함께한다. 하나님이 함께 하심이 최고의 은혜이다.



위 글은 교회신문 <915호> 기사입니다.


정한영 안수집사

신문발행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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