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론과 훌] 악마는 평범한 곳에서 기생한다

등록날짜 [ 2020-04-04 11:02:58 ]

범죄를 관행처럼 여기고, 인간을 성적으로
대상화해 팔고 사면서도 반성의 사유 없이
방조하는 사람들이 우리 속에 악마 만들어
이번 기회 성에 대한 잘못된 관념 뜯어 고쳐야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만들고 전 국민을 경악시킨 성(性) 착취물 집단공유사건 ‘n번방’ 주범 조주빈이 구속됐다. ‘n번방’은 해외에 서버를 둔 수많은 ‘비밀 채팅방’에서 미성년자를 포함 수많은 여성을 성 고문하거나 성 노리개처럼 다룬 사진과 영상을 공유한 데서 붙여진 별칭이다.


하지만 이 사건은 조주빈 사건도 아니고 n번방도 아닌, 성 착취범죄로 단죄해야 마땅하다. 성범죄자 신상을 공개하고 합당한 처벌을 내리라는 청원이 기록을 경신하면서 조주빈 얼굴이 공개됐는데 그가 기자들 앞에서 한 첫마디는 “악마의 삶을 멈춰주어 고맙다”는 것이다. 언뜻 들으면 반성하는 말 같지만 담담한 태도나 이어진 답변을 보면 자기는 특별한 존재라고 우월감을 표현한 말이다. 체포돼 기자들 앞에 서서도 자신은 악마처럼 힘센 존재라고 과시한 것이다.


워낙 사건에 대한 국민적 관심이 크다 보니 조주빈이 누구고, 구체적으로 어떤 범죄를 저질렀나에 말초적 관심을 쏟는 언론도 있지만, 이것은 본질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 사회가 성적으로 얼마나 타락했고, 여성에 대한 성 상품화가 어느 정도 넓게 퍼졌는지 병든 모습을 단적으로 드러냈다. 그동안 몰래카메라나 성 영상을 만들어 올려 돈을 벌거나 이를 즐기지만 제대로 처벌받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사건이 터진 것이다. n번방은 수십만이 넘는 유료회원이 있고 채팅방에 이른바 여성 노예가 직접 참여해 회원이 시키는 대로 따라 했다는 보도가 나오면서 회원들도 엄하게 처벌하라는 여론이 있지만 먼저 사건의 본질을 제대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조주빈은 자신을 악마라고 표현했지만 사실 주범이나 공모자들은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이고, 성 관련 영상물을 컴퓨터 게임 하는 것처럼 즐긴다. 우리는 악에 대한 선입견을 근본적으로 바꿀 필요가 있다. 범죄자, 변태 성욕자, 악마는 특별한 유형이나 사이코패스가 아니다. 오히려 범죄를 관행처럼 여기고, 인간을 성적으로 대상화해 팔고 사며 반성의 사유 없이 이를 방조하는 사람들이 우리 속에 악마를 만든다.


전형적 예가 있다. 2차 대전이 끝난 후 아르헨티나에 숨어 살던 아돌프 아이히만이 이스라엘 정보기구에 의해 체포돼 이스라엘 법정에 섰다. 아이히만은 유대인 수송 열차에 가스관 장치를 부착해 수많은 유대인을 학살하고, 재산을 압류하고, 포로들을 분류해 가스실로 보낸 나치 책임자였다. 사람들은 막상 아이히만이 평범하게 생겼고, 지극히 예의 바르며, 자신은 상부 명령을 충실하게 이행했을 뿐 사람을 죽이지 않았다고 주장하자 충격에 빠졌다. 실제 아이히만은 단지 군인으로서 유대인 재산이나 생명을 박탈하는 서류 업무만을 담당했고, 그것 때문에 죽은 유대인들은 자기 책임이 아니라고 믿었다. 이것은 궤변이다. 이 재판을 목격한 철학자 한나 아렌트가 ‘악의 평범성’이라는 말로 이를 표현하면서 아무런 성찰적 태도 없이 국가의 명령이나 의무를 기계적으로 수행하는 것이 악이라고 이 사건을 규정했다.


조주빈이나 거기에 동조한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성 동영상을 보고 즐기면서 그 속에서 울고 고통당하는 수많은 여성을 사람이 아니라 한낱 캐릭터처럼 대하고 성 착취를 놀이로 생각했기 때문에 죄의식 없이 범죄를 저지를 수 있었다. 어떤 일을 할 때 그것이 가져올 결과를 생각하지 않고 행동한다면 자기도 모르게 악마가 될 수 있다. 범죄를 저지른 몇몇을 엄벌한다고 이런 악이 없어지지는 않는다. 이번 기회에 악마를 배양하는 우리 사회의 문화와 범죄구조를 발본색원하고 성에 대한 잘못된 관념을 뜯어고쳐야 한다. 악마는 도처에 있다.

위 글은 교회신문 <670호> 기사입니다.


김석 집사
現 건국대 철학과 교수 철학박사(프랑스 현대철학)
신문발행국 논설부장


이 기자의 다른 뉴스 보기

    아이디 로그인

    아이디 회원가입을 하시겠습니까?
    회원가입 바로가기

    아이디/비번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