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론과 훌] 코로나19 대변혁과 성도의 사명

등록날짜 [ 2021-02-07 21:37:23 ]

2019년 12월 31일, 정체불명의 폐렴이 중국 우한에서 처음 보고될 당시만 해도 이 전대미문의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의 무서움을 우리는 제대로 알지 못했다. 지난해 1월 국내 첫 확진자가 발생한 후 1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바이러스는 전 세계 경제, 문화를 비롯해 개개인의 삶을 강제로 바꾸어 놓고 있다.


백신이 나왔으니 조금만 더 참으면 전처럼 마스크 없이 어디든 자유롭게 다니고 예배당, 콘서트홀, 운동경기장 관람석을 빼곡히 채우던 과거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인가?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계속 변종 바이러스가 출현하고 있고, 독감백신이 해마다 유행하는 독감을 막을 수 없는 것만 보더라도 알 수 있다. 또 코로나바이러스는 페스트나 메르스처럼 바이러스가 숙주인 인간과 공멸하면서 생태계적으로 줄어드는 현상도 나타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더욱이 무증상 전파 기간이 너무 길어서 감염자 통제도 어렵다. 백신개발의 선두주자인 모더나社의 CEO 스테판 반셀조차 “코로나바이러스는 영원히 종식되지는 않고 풍토병처럼 남을 것”이라고 견해를 밝혔다. 그렇다면 이 같은 대변혁 시기에 기독교인은 어떻게 지혜를 구하고 다가올 미래를 대비해야 할 것인가?


먼저 기도해야 한다. 코로나가 기승하던 지난해부터 엄청난 부(富)의 재분배가 시작되고 있다. 코로나로 유통시장의 패러다임이 바뀌었고, 금융, 무역, 쇼핑 등이 비대면으로 이루어지면서 인당 생산성이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소비자는 좋든 싫든 온라인 플랫폼 안에 머물러야 했다. 여기서 흐름을 쫓지 못한 기업은 몰락해 가고 기업의 차별화가 극대화하는 과정이 계속됐다. 기존 패러다임과 고용정책에 묶인 대형 은행 같은 경우는 앞으로도 고전을 면치 못할 것이다. 사회가 변화하고 있으니 ‘좋은 날 오겠지’라고 기다리지 말고 자신을 비우고 뒤집는 과정이 필요한 때다. 자리 안 나는 취업 라인에 마냥 줄 서기보다 블루오션을 찾아야 한다. 다가올 큰 변화의 시대를 살아갈 지혜는 내 생각을 멈추고 주님께 집중하는 시간에 흘러 들어 온다. 바로 기도하는 시간이다.


둘째로 부(富)하려고 하는 내 마음의 중심을 살펴야 한다. 근래에 사람들만 모이면 주식시장, 주택시장이 화제다. 영혼까지 끌어 모아 투자한다는 ‘영끌’, 빚을 내서 투자한다는 ‘빚투’라는 말이 일상용어가 된 ‘욕망의 공화국’이 되었다. 여기에는 정책 실패도 한몫해서 집값, 전셋값이 급등해 ‘벼락거지’가 양산되고, 코로나 여파로 닥친 경제변혁에 떠밀린 200만이 넘는 실업자도 원인이 있지만, 이 같은 염려에 부화뇌동하면 오히려 망한다. 오래전부터 부동산 개발규제정책으로 지난해 서울의 신규아파트 입주율이 전년대비 -47퍼센트, 올해가 -45퍼센트인 반면, 비대면 경제활동과 대인접촉 차단이 주는 고립감을 떨치기에 용이한 서울 같은 도시지역 경제인구 집중은 더 심화했다. 따라서 현재의 주택대란은 예견되었으나 장기적으로 보면 한국은 인구가 급격히 줄어드는 인구절벽에 들어갔음을 감안해야 한다. 염려에 떠밀리고 부해지려는 마음에 앞뒤 안 재고 빚을 진다면 멜기세댁 시대에 소돔왕이 대외정책을 실패해 온 국민이 재산을 적국에 몰수당하고 여자와 자녀들이 포로로 잡혀가는 것 같은 참사를 가져올 수 있다.


그런데도 우리는 왜 정직한 경제활동을 하고 가능하면 재물을 많이 얻어야 할까? 그것은 교회와 교우들과 사회에 재물을 나누라는 주님이 주신 사명 이상 이하도 아니다. 지혜롭게 직장이나 기업을 구하려고 기도한 자는 “제가 세금을 누구보다 많이 내서 파탄지경의 국가재정을 구하는 자가 되게 하소서. 건강보험료를 누구보다 많이 내서 더욱 강한 의료복지로 방역을 더 잘하게 하소서”라고 기도한다. 처음에는 어색할 수 있겠으나 계속 기도하다 보면 경제활동을 하는 내 중심이 바뀌는 것을 경험한다. 어차피 천문학적으로 늘어난 국가부채는 다음 정권이 누구든 갚아 나가야 할 짐이고, 양극화와 인구절벽이 현실인 한국 사회에서 많이 버는 자는 더 나눠 주어야 할 것이다. 또 작은 혁신기업들이 현대차, 삼성전자를 능가하는 시가총액을 보이는 것처럼 기업의 양극화는 부의 양극화로 연결되고, 이때 소수의 부유층이 세금을 많이 내서 대다수의 ‘기본소득’을 유지시키는 개념은 굳이 ‘공산주의’가 아니더라도 보편적 이데올로기가 될 가능성이 높다.


예수 믿는 자는 급박하게 변하는 세태에 불평만 늘어놓지 말고 하나님 말씀을 떠올리자. “범사에 너희에게 모본을 보였노니 곧 이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의 친히 말씀하신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찌니라”(행20:35).




위 글은 교회신문 <684호> 기사입니다.


박성진 집사
연세오케스트라상임단장
㈜한국M&A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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