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칼럼]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 (1)

등록날짜 [ 2021-08-03 14:49:23 ]

아담의 타락 이래 모든 인류

죄의 짐을 짊어지고 살게 돼

예수님은 참 안식 보장하시며 

내게 와서 쉼을 얻으라고 당부


필자는 서울신학대학교에서 30년 넘게 교수로 즐겁게 일하다 은퇴했다. 신기하게도 그다음 달부터 그토록 원하며 기도해 온 목회를 뒤늦게, 담임목사로서 5년여 동안 할 수 있었다. 


목회하면서 가장 마음에 고통스럽던 것은 성도들이 당하는 현실, 그 고난이었다. 그건 인간의 실존(實存)이었다. 어느 날 갑자기 닥치는 질병, 절망적인 암과 싸우는 분들, 가족을 잃는 비통, 삶의 기반이 되는 사업과 직장의 위기, 잇따른 경제적 어려움, 근심 걱정에 더하여 자녀 문제로 눈물짓고, 갑작스러운 영적 침체에 이르기까지…. 현실의 무자비한 고통에 나의 마음은 연민으로 아파 왔다.


예수님도 인간들을, 특별히 당시의 유대인들을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로 보시고 긍휼히 여기시며 그들에게 “다 네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호소하셨다(마11:28).


송상철 목사가 쓴 ‘풍성한 그리스도인의 삶’ 글에서는 세상을 살아가며 무거운 짐을 지고 가는 네 부류의 사람을 그리고 있다. 짐을 지고 가는 자, 짐을 끌고 가는 자, 바퀴를 달고 끌고 가는 자 그리고 마지막은 짐을 싣고 자신도 타고 예수님이 맡아서 운전해 주시는 자가 있단다. 이는 신앙생활의 모습들이기도 하다. 짐을 지고 가는 자나 끌고 가는 자들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그들에게 예수님은 쉽고 가벼운 짐으로 바꿔 주시며 쉬게 해 주겠다고 “지금 오라”, “나에게 오라”고 말씀하신다.


아담의 타락, 죄의 짐 짊어진 인류

인간의 수고하고 무거운 짐은 인간 타락에서 시작된 죄로 말미암는 것이다. 예수님은 그 무거운 율법의 정죄, 유대교의 종교법 쇠사슬의 죄와 죄책에서 풀어 주시려는 것이다. 왜냐하면 죄에서 인간의 모든 문제가 파생되었기 때문이다. 아담의 타락 이래 태어난 모든 사람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살아가게 됐다.


에덴의 타락 전에는 평화와 안식만 있었다. 아담에게 “선악(善惡)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는 먹지 말라”는 하나님 명령이 주어진다. 선한 일은 행하고(행하지 않으면 죄), 악한 일은 하지 말라(행하면 죄)는 선악(善惡)의 계명이다. 이 명령은 인간을 죽음에서 보호하고 에덴의 평화와 안식을 보존할, 전적으로 인간을 위한 사랑의 명령이요, 최소한의 보호 경계선이었다.


타락의 핵심은 바로 아담이 사단의 속성과 사상인 “하나님같이 되겠다”는 넘지 말아야 할 경계선을 넘어 불순종으로 그 계명(명령)을 범한 것이다. 피조물인 인간이 하나님같이 되겠다는 무서운 교만, 반역, 창조주(하나님)와 피조물(인간) 사이의 경계선 파괴로 죄악과 사망의 길로 치달았다. 에덴의 평화와 기쁨의 삶이 죄의 무거운 짐으로 바뀐 것이다. 아담 안에 모든 인류가 속하였기에 그 후손들도 죄성, 죄인의 모습으로 전락하게 됐다.


그런데 이 에덴의 선과 악의 계명이, 이스라엘 공동체(개인→백성→인류)에게는 ‘에덴의 선악과 명령’과 똑같은 ‘하나님 명령’이 시내산 계약으로 확대되어 다시 구체화된다. 시내산 계약에서 주어진 계약법은 전적으로 인간 스스로 행하도록 하는 명령이다. 이 율법의 계명은 더 구체적으로 “무엇을 행하라”는 선(善)에 속한 것이 248계명이고, “무엇을 행하지 말라”는 악(惡)에 속한 것이 365계명이며 전체 613계명은 ‘선악과 명령’을 전 인류에게로 확산, 구체화한 것이다.


인류에게 참된 안식을 주신 예수

이 계명들을 어떻게 지켜야 한다는 랍비들의 가르침을 첨가한 종교법이 엄청난 분량으로 확대되어, 유대인들은 행하여 지켜야 하는 율법의 엄청난 무게로 육체적 피곤만이 아니라 정신적, 영적 피로감에 지쳐 가고 있었다. 예를 들어 “안식일에는 아무 일도 하지 말라”(신5:14)를 랍비들이 해석해 성경에 없는 일상생활의 규율을 지나치게 더했다. 과일 따기, 나물 채취하기, 화초에 물 주기를 할 수 없고 과일을 짜서 주스 내는 일도 금지되었다. 불이나 전기 스위치를 켜고 끌 수 없었다. 자동차에 시동을 걸면 스파크를 일으켜 연료를 태워야 하므로 자동차 사용을 금한다. 때 묻은 곳을 문질러서도 안 되고, 평일에 사용하는 도구들을 사용할 수 없다는 법도 있다. 우리 조상들이 갖가지 미신에 사로잡혀 자유가 없던 때의 모습보다 훨씬 엄한 규율의 짐이었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38년 된 병자를 고치시면서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요5:8)고 하셨다. 이 한 마디는 안식일에 조그만 열매 이상의 무게를 들 수 없고, 2m 이상 물건을 운반할 수 없고, 2천 큐빗(900m 정도) 이상 걷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 대한 직접적인 도전이었다. 율법은 오히려 인간을 정죄하여 죄의 종으로 인간을 짓누르는 무거운 짐이 되고 있었다.


인간의 짐 중에서도 가장 무겁고 엄중한 짐이 죄의 짐인데, 이 율법적 계명을 범함으로 파생된 죄와 죄책의 결과인 죽음, 두려움, 질병, 고난, 허무, 스트레스, 피곤 등에 인간은 젖어들게 된 것이다. 인간 타락의 죄로 말미암아 사람뿐 아니라 “모든 만물도 피곤하다”는 것이다(전1:8). 여기에 주님은 율법이 아닌 복음으로 인간에게 평화와 쉼을 보장하시며 예수님께 오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율법과 복음의 절대적 구분과 차이가 있는 것이다.



/최종진 목사
前 서울신학대학교 총장
前 한국기독교학회장



위 글은 교회신문 <710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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