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날짜 [ 2025-08-13 11:05:45 ]
마귀는 늘 우릴 속이고 미혹하기에
영적으로 깨어 쉬지 말고 기도해야
기도 응답이 더디거나 거절되어도
예수님처럼 “아버지의 뜻대로 되길
원하나이다” 믿음의 기도를 드려야
최후의 유월절 만찬 이후 예수께서는 스가랴 13장 7절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칼아 깨어서 내 목자, 내 짝된 자를 치라 목자를 치면 양이 흩어지려니와 작은 자들 위에는 내가 내 손을 드리우리라” 예언을 인용하시며 제자들 모두가 자신을 버리게 될 것이라고 예고하십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이는 기록된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들이 흩어지리라 하였느니라”(막14:27).
이 말씀을 들은 제자들은 큰 충격을 받았고, 특히 수제자 베드로는 “다 버릴찌라도 나는 그렇지 않겠나이다”라고 장담합니다. 이에 예수께서는 베드로에게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이밤 닭이 두번 울기 전에 네가 세번 나를 부인하리라”라고 말씀하십니다(막14:30).
예수께서는 3년간 동고동락하며 수많은 이적을 목격하고 하나님 나라의 교훈을 들은 제자들조차 결국 자신을 버린다는 결말을 아셨습니다. 그들의 믿음은 여전히 연약했고,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을 로마에서 해방시킬 정치적 메시아가 되시기를 기대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찌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막14:31)라는 다짐도 로마와의 전쟁에서 주님과 함께 싸우겠다는 인간적 신념이지, 십자가의 고난에 동참하겠다는 믿음은 아니었습니다.
다른 제자들도 베드로처럼 “자신들은 절대 주를 버리지 않겠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체포되자 그 다짐이 무색하게 모두가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칩니다. 한 청년은 벗은 몸에 베 홑이불을 두르고 예수님을 따라가다가 무리에게 붙잡히자, 홑이불을 버리고 벗은 몸으로 도망칩니다(막14:51~52).
이 장면은 복음서 중 마가복음에만 기록되어 있으며, 학자들은 이 청년이 마가 자신일 가능성이 높다고 봅니다. 얼마나 두렵고 무서웠으면, 부끄러운 줄도 모른 채 벗은 몸으로 도망쳤을까요? 감추고 싶은 부끄러운 경험을 복음서에 굳이 드러냈다는 것은 인간의 연약함을 강조하려는 의도가 아닐까요?
그렇습니다. 우리는 믿음을 지키는 일조차 우리 힘으로 할 수 없습니다. 주님의 은혜가 아니면 우리는 믿음을 유지할 수도, 주님과의 약속을 끝까지 지킬 수도 없는 연약한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만하지 말고 날마다 주님의 도우심을 겸손히 구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믿음을 끝까지 지켜 천국의 영광에 이를 수 있습니다.
네가 한시 동안도 깨어 있을 수 없더냐
유월절 만찬을 마치신 예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감람산의 서쪽 기슭에 있는 겟세마네 동산으로 가십니다. 이곳은 예루살렘 동편, 기드론 골짜기 너머에 있는 동산인데, 예수께서 기도하시려고 자주 찾던 곳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내가 기도하는 동안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라고 말씀하신 후 베드로, 야고보, 요한을 데리고 더 깊은 곳으로 나아가십니다.
<사진설명> ‘겟세마네’였다고 추정하는 감람산의 올리브나무 숲.
이때 예수님은 심히 놀라고 슬퍼하셨습니다(막14:33). 33절의 ‘슬퍼하다’라고 기록된 헬라어 ἀδημονεῖν(adēmonein)은 ‘극심한 고통과 번민에 빠지다’, ‘탈진할 정도로 괴로워하다’를 뜻합니다. 단순한 슬픔을 넘어서, 마음이 짓눌리는 고뇌의 상태입니다.
그렇다면 왜 예수께서 이토록 슬퍼하셨을까요? 주님은 마지막 만찬 자리에서 십자가 죽음을 말씀하셨지만, 제자들은 이스라엘이 회복될 것이라는 정치적 기대에 사로잡힌 무지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다의 배신뿐만 아니라, 십자가의 길을 홀로 감당해야 한다는 현실을 앞두고 감정이 더 격해지는 내면의 고통을 느끼셨을 것입니다.
이어 예수님은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깨어 있으라”라고 당부하신 후 땅에 엎드리어 기도하십니다. “아바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막14:36).
이처럼 주님께서 짊어져야 할 십자가의 고난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통의 잔이었습니다. 인류의 모든 죄를 짊어지고 하나님의 진노를 대신 받아야 하는, 하나님과 단절됨을 감내해야 하는 영적인 절규였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끝내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셨습니다. 그 순종의 결과가 바로 우리의 구원입니다.
다시 제자들에게 돌아오신 예수께서는 그들이 잠든 것을 보시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막14:38).
예수님은 참인간으로 이 땅에 오셨으나 죄는 없으신 분입니다(히4:15). 인간의 몸을 입으셨지만, 항상 기도하심으로 시험을 이기고 마귀를 물리치셨습니다. 겟세마네의 기도는 그 절정이었고, 누가복음은 이렇게 전합니다.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피 방울같이 되더라”(눅22:44). 그러나 주님의 거듭된 당부에도 제자들은 깊은 잠에 빠져 있었고, 결국 그들은 영적 시험 앞에서 준비되지 못한 채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이 말씀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우리는 피곤하고 연약하며 쉽게 흔들리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영적으로 깨어 있어 날마다 기도해야 합니다. 시험에 들게 하려고 악한 마귀는 끊임없이 우리를 속이고 미혹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목적은 단순히 원하는 바를 얻기 위함이 아닙니다. 내 믿음을 지키고 시험에 들지 않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는 우리에게 참된 기도의 본을 보여 줍니다. 기도 응답이 지연되거나 심지어 거절되는 순간에도 하나님께 “왜 응답하지 않으십니까”라고 불평하기보다,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라고 기도하는 것이 바로 믿음의 기도입니다.
또 예수님은 고통과 죽음을 앞두고 미리 기도하셨습니다. 우리도 지금 예수께서 재림하실 징조가 나타나고, 환란과 핍박이 점점 현실이 되어 가는 중에 예수님의 기도를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의 믿음을 지키느라 감옥에 끌려가거나 심지어 순교해야 할 상황이 닥칠 때 “이 고난에서 벗어나게 해 주십시오”라고 간구할 수도 있으나, 동시에 “그렇지 않더라도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를 원합니다”라고 기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깨어 기도할 때 우리는 시험을 이기고, 주의 뜻에 순종하며, 끝까지 믿음을 지킬 수 있습니다.
주님은 지금도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한시 동안도 깨어 있을 수 없더냐?” 이 마지막 시대, 우리에게 가장 시급한 사명은 깨어 기도하는 일입니다.
위 글은 교회신문 <912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