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사일언] 학생인권조례를 그토록 반대한 이유

등록날짜 [ 2013-01-29 15:16:45 ]

#1. 한국 근대사에서 1876년 일본과 맺은 강화도조약이 갖는 의미는 특별하다. 외국과 맺은 최초의 근대적 조약에, 일본에는 권리만 있고, 조선에는 의무만 있는 불평등조약이다. 그러나 사실 그 내용만 보면 우리나라에 그다지 큰 불이익을 주지는 않는다. 내용상으로는 한국과 일본이 서로 통상무역을 하고, 또 한국이 개항하며, 치외법권을 인정해 일본인이 조선에서 처벌받지 않는다는 내용이다. 어떻게 보면 강대국과 약소국이 맺은 당연한 조약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것이 발단이 되어 일본은 야금야금 한국에서 자국의 권리를 늘려 가더니, 결국 30년 후 1905년 을사늑약을 맺어 외교권까지 빼앗아 조선을 식민지로 만들었다.

강화도조약 이후에도 조선은 다른 강대국과도 많은 조약을 맺었다. 그러나 일본은 조선을 식민지화하려고 장기 계획을 수립해 놓고 아주 조금씩 잠식해 들어왔는데, 조선은 그 수법에 고스란히 당했다. 세계 정세에 어두웠던 조선은 결국 일본의 마수에 걸려 나라까지 내어주는 어처구니없는 일을 당하고 말았다. 강화도조약이 일본의 강요로 맺은 어쩔 수 없는 조약이라고는 하지만, 결국 그것이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가 되는 빌미가 되었다는 것을 세월이 흐른 후에야 깨달을 수 있었다.

#2. 학생인권조례 제정 당시 기독교를 비롯해 많은 시민단체가 우려한 것은, 무엇보다 임신과 동성애를 조장하고 기독교 교육을 말살하려는 의도 때문이었다. 불과 수년 후에 일어날 파문이 얼마나 클지를 알기에 절대 받아들일 수 없다. 인권조례 때문에 임신을 해도, 또 동성애를 해도 아무도 제재하거나 막을 수 없는 것은 소수를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다수를 더 많은 소수자로 만들 수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아직 사리판단이 미숙한 학생들이 저지를 불장난(?)을 미리 막도록 교육조차 할 수 없는 상황으로 만드는 것이 과연 인권이라 할 수 있는가. 잘못을 덮어두고 무조건 정당화하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가.

기독교를 비롯해 시민단체가 학생인권조례 반대를 위해 끝까지 투쟁하고 있고, 초·중등교육법을 통해 학생인권조례가 사실상 무산되었다고 하지만, 사실 더 무서운 것은 학생인권조례의 시행 여부가 아니다. 학생인권조례가 통과된 후, 그 개정 여부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을 무렵, 서울시의회는 어린이청소년인권조례를 별다른 방해(?)를 받지 않고 통과해 버렸다. 이제 학교뿐만 아니라 일반 사회에서도, 가정에서도 어린이와 청소년들이 동성애에 완전히 노출될 것이다.

더 중요한 것은 어린이청소년인권조례에 “특정한 종교나 사상에 대한 학습이나 행사 참여를 강요받지 아니한다”(제12조 2항)고 적시하고 있으니, 앞으로는 부모가 아이에게 신앙생활을 하도록 권면조차 못할 수도 있다. 자녀가 그것이 강요라고 주장하면 달리 반박할 수 없기 때문이다.

#3. 서울시에서 만든 이 어린이청소년인권조례는 이제 다른 시·도의회로 퍼질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근간이 되어 상위 법률이 제정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이제 일본처럼 한국에서도 노방전도라는 말은 없어질 것이 뻔하다(현재 일본은 종교 자유 원칙에 따라 특정인에게 종교를 강요할 수 없다). 비록 여러 문제점이 있기는 하지만, 아직 많은 이가 길거리에서 전하는 복음을 듣고 교회로 인도되며, 하나님 말씀을 듣는다. 그런데 그 중요한 수단이 사라지게 되었으니 이제 한국교회 부흥이 다시 일어날지 의심스럽다.

어린이청소년인권조례가 공포된 이상 학생인권조례는 없어도 그다지 큰 문제가 아니다. 교육감 하나를 잘못 뽑아서 그가 뿌리고 간 독초는 끈질기게 살아남아 지금 우리에게 정신적 질병을 안겨 주고 있다. 학생들의 자유와 인권을 보장한다는 허울 좋은 구실로 학생인권조례를 밀어붙이고 그것에 동조한 많은 기독교인은 이제 자신들이 뿌린 독소에 머리를 감싸고 드러누울 날이 머지않았다. 

우리나라 근대사에서 강화도조약이 갖는 엄청난 해악처럼 그렇게 인권조례를 통해 우리나라 기독교는 점차 망해 갈지도 모른다. 이렇게 망해 가도록 내버려둘 것인가, 아니면 어린이청소년인권조례가 폐지될 때까지 적극적으로 힘을 모아 기도할 것인가, 선택해야 할 때다.


/정재형  편집장
신문발행국

위 글은 교회신문 <323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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