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하나님에게서 오는 사랑이야말로 진정한 사랑

등록날짜 [ 2014-03-31 11:13:01 ]

인간은 언제나 자기만족에 사는 이기적인 존재일 뿐
한계가 없는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체험해야



그리스어로 남녀 간의 사랑을 ‘에로스’, 친구들 우정은 ‘필리아’라 부른다. 에로스가 서로 하나가 되어 부족한 부분을 채우고 삶을 풍요롭게 하려는 열망이라면, 필리아는 성숙한 사람들이 나누는 우정이다. 이번 시간에는 초월적 존재인 하나님에게서 오고 그리스도 공동체가 함께 실천해야 하는 사랑 ‘아가페’에 관해 알아보자. <편집자>

사랑의 위험과 나르시시즘
우리가 사랑을 갈망하고 누군가를 필요로 한다면 무언가 부족함이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에로스와 필리아 덕분에 타인과 관계를 맺어 자신에게 모자란 부분을 채우고 어떤 완전함을 향해 나아갈 수 있다. 하지만 지난 호에 보았듯이 에로스와 필리아는 근본적으로 한계가 많다. 실존주의 철학자 키에르케고어는 에로스와 필리아가 지닌 한계를 다음과 같이 비판했다.

“연애(에로스)는 대상에 의해 규정되고, 우정(필리아) 역시 대상에 의하여 규정된다. 다만 이웃을 향한 사랑만이 사랑에 의해 규정된다. 우리의 이웃은 곧 모든 사람이므로 대상에서 모든 차별이 제거된다. 그러므로 진정한 사랑과 그 사랑의 대상에는 어떤 구체적인 특정 차별 규정도 없다는 것으로 인지될 수 있다. 곧 이웃을 향한 사랑은 사랑에 의해서만 인지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것은 최고의 완전성이 아닐까.”

쉽게 말해 에로스와 필리아는 무언가 내 편에서 원하는 바가 생길 조건적 사랑으로 언제든 돌변할 수 있다. 에로스나 필리아는 평상시에 긍정적 힘을 발휘하다가도 자칫 내 만족과 이익 때문에 상대에게 괴로움을 주는 이기주의 함정에 쉽게 빠질 수 있다. 프로이트가 지적했듯이 인간은 본래 자신을 사랑하고 자기 관점에 기초해 남을 평가하고 대하는 방어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사랑을 하는 이유도 자아도취의 심리인 나르시시즘 때문이다. 나르시시즘을 느끼고 자신을 완성하고자 자신이 생각하는 이상을 투영할 누군가를 필요로 한다. 나르시시즘 이론에 의하면 우리가 사랑할 때 사랑하는 대상은 우리 자신이고 상대에게서 나를 발견할 때 사랑을 느낀다. 만약 상대가 나를 부정하거나 거스르면 사랑은 쉽게 미움으로 바뀐다. 그런 연유로 성 토마스는 사랑에는 자애적 측면과 탐욕적 측면이 공존한다고 지적하였으며 프로이트는 사랑과 미움이 하나라고 말했다.

인간은 누군가를 사랑할 때 언제나 자신이 타자에게 인정되고 비슷한 보답을 받기를 바라는 마음이 들기 마련이다. 타자를 사랑할 때 자신이 신봉하는 가치관과 이상을 강요하기 쉽다. 오래된 부부가 자주 다투다 황혼 이혼을 하고 친구 간에 우정이 깨지는 이유도 따지고 보면 나르시시즘을 극복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희생적 사랑의 대명사인 스트로게(부모 자식 간 사랑)에도 나르시시즘이 반영된다. 부모는 자식을 그 자체로 인정하여 자식의 행복을 바라지 않고 마치 자신의 분신처럼 생각하여 자신이 못 이룬 꿈이나 욕망을 자식에게서 실현하려고 한다. 자식으로 말미암아 대리만족을 실현하면서 그것을 사랑이라고 착각한다. 이러한 사랑은 많이 쏟으면 쏟을수록 오히려 구속과 폭력이 될 수 있다. 자식을 극진히 위하고 자식의 장래를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는 부모가 늘 자식을 행복하게 해 주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사랑이 본래 지닌 긍정적 힘을 발휘하려면 사랑에 깔린 나르시시즘을 초월해야 한다. 인간의 한계를 벗어난 무조건적인 하나님의 사랑 ‘아가페’는 그래서 필요하다.

초월적인 사랑, 아가페와 이웃사랑
사랑이 우리를 변하게 하고 선을 실현하는 힘을 발휘하려면 전제를 새롭게 할 필요가 있다. 이 전제는 무조건 상대에게 내 욕망을 강요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루고자 하고, 한쪽이 다른 한쪽을 위한 희생을 당연시하거나, 어떤 지고한 이상에 이끌리어 상대를 사랑하는 에로스 사랑을 극복하는 것이다.

키에르케고어는 진정한 사랑은 철저한 자기부정에서 출발해야 하며, 모든 편애와 정열을 벗어나 이웃을 그 자체로 사랑하는 것이 사랑의 본질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러한 사랑의 예를 복음서가 말하는 이웃사랑에서 찾는다. 그런데 이웃사랑을 실현하려면 에로스와 필리아를 넘어서는 초월적 사랑인 아가페에 기초해야 한다.

아가페는 원래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초월적 영역과 만날 때 느끼는 황홀경을 뜻했지만, 나중에는 하나님이 베푸는 무조건적 사랑 혹은 하나님에게 다가가려는 절대적 사랑, 하나님에게 받은 사랑으로 이웃을 대하려는 초월적 사랑으로 정의된다.

에로스와 필리아가 이기적이고 조건적인 사랑이라면 아가페는 무조건성과 절대성을 특징으로 한다. 예를 들어 가난한 이웃을 돕고 나서 사람들 칭송을 기대하거나 자신이 대단한 사람이라고 만족감을 느낀다면, 그것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다. 또 상대가 내 사랑을 받을 만한 존재고 그와 교제함으로써 무언가 유익을 얻고자 좋아한다면, 그것도 사랑이 아니다.

아가페는 오히려 상대에게 어떤 제한이나 편견을 두지 않고 모든 소유를 대가 없이 베푸는 사랑을 말한다. 아가페가 가능한 이유는 우리가 사랑의 은총을 먼저 맛보았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요일4:7). 에로스와 필리아가 내 노력으로 가능한 사랑이라면 아가페는 위로부터 내려오는 은총이다. 우리가 아가페를 실천하고 나눌 수 있다면 그것은 이 사랑에 이미 인류를 살리고자 하나님 자신이 희생한다는 차원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조건과 제한 없이 인류에게 베푸신 사랑을 체험했고 그 힘을 느낄 때 그것을 내 이웃에게 베풀 수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자가 이웃을 사랑할 수 없고,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 자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도 말이 안 된다.

바울이 고린도교회 교인들에게 권면한 사랑이 바로 이런 아가페 사랑이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받아들이는 교회 공동체가 아가페를 실천하는 공간이며, 이 속에서 우리는 진정한 그리스도의 공동체를 실현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이 공동체에서는 모든 허물이 덮어지고 차이가 존중되며 각자 협력해 진정한 선을 이룰 수 있다.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찌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벧전4:8). 이웃을 제대로 사랑할 수 있으려면 내가 먼저 하나님이 베푸는 은총인 아가페를 체험해야 한다. 아가페는 인간의 한계를 넘어 세상을 변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공동체인 교회를 건강하게 만들 수 있는 힘이다. 사랑이 제일인 이유는 이 때문이다.


/김 석 집사
철학박사(프랑스 현대철학)
現 건국대 자율전공학부 교수
신문발행국 논설부장

위 글은 교회신문 <379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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